보는 영화 읽는 영화    2024.10월호

돌봄의 연쇄 안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가족

딸에 대하여



김경태 영화평론가





노년에 접어든 ‘엄마(오민애)’는 요양 보호사로 일하면서 혼자 살고 있다. 유일한 자식인 딸 ‘그린(임세미)’은 동성 연인 ‘레인(하윤경)’과 동거 중이다. 올라버린 집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그들은 결국 엄마의 집에 같이 들어가 살기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딸의 성 정체성이나 동성 연인을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다. 관계를 인정받기에 앞서서 먼저 가족처럼 함께 살게 된 불편하고 어색한 모순적 상황이다. 엄마는 딸의 방 문틈으로 침대 위에 살을 맞댄 채 잠든 그들을 목격한다. 그동안 모호하기만 했던 동성애의 구체적인 형상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엄마와 그들 사이에는 묘한 냉기가 흐른다. 엄마에게는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그들의 관계가 그저 철없는 소꿉장난처럼 보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 엄마는 동성애 자체를 혐오하고 있다기보다는 동성애자가 처해 있는 차별적 환경 때문에 딸의 미래를 염려한다. 그린은 여성이자 성 소수자이며 대출조차 받기 힘든 불안정한 계약직으로 취약한 계층의 집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딸은 여타의 성애화된 동성애자를 넘어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들과 동일시된다. 엄마 입장에서는 딸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관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설사 본심이 아니더라도 딸의 동성애를 외면해야 한다. 안심하며 떠날 수 있도록 혼인에 기반한 ‘정상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필요성을 딸에게 호소해야 한다.


엄마는 요양 보호사로서 자신이 돌보는 무연고자 노인 ‘제희(허진)’에게 먼 미래의 딸의 모습을 투영한다. 제희는 재단을 설립해 해외의 빈곤한 아동들이 입양을 통해 보다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왔다. 평생 아이들을 보살펴 왔지만 정작 치매에 걸린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자식 하나 없이 재단의 후원에 의존한다. 엄마는 노년의 딸을 상상하며 제희를 정성껏 돌본다. 재단의 후원이 끊기면서 열악한 다인실로 병실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이를 막기 위해 끝까지 애쓰기도 한다. 주변에서는 남에 불과한 제희를 향한 엄마의 과도한 애착을 의아하게 여긴다. 분명, 요양 보호사로서 그녀에게 주어진 의무 이상의 돌봄, 과잉된 돌봄이다.


레인은 엄마가 사사건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심지어 나가달라는 요청까지 하지만 그린과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 전혀 없다. 요리사 지망생인 만큼 이런저런 음식들을 만들어서 권하며 엄마의 마음을 열기 위해 애쓴다. 돌봄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는 그린과 자신을 챙기는 레인의 노력에 조금씩 감응한다. 엄마는 레인의 정체성은 이해하지 못해도 그녀가 보여주는 돌봄에의 의지는 공감한다. 그들이 실천하는 돌봄은 규범의 층위를 벗어나 있다는점에 공명한다. 레인은 혼인이 불가능한 연인 관계지만 연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엄마는 요양 보호사에게 요구되는 업무 이상으로 제희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들의 돌봄은 관계의 명명이나 정의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돌봄은 언제나 관계에 앞서 있으며 관계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사회가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한을 걸더라도 돌봄을 향한 욕망은 통제할 수 없다. 관계는 부정할 수 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돌봄의 행위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만큼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보살피는 모습들에 집중한다. 사실, 엄마와 딸, 그리고 딸의 연인은 모두 돌봄의 진가를 아는 같은 부류의 사람일지 모른다. 비록 가족의 외형을 둘러싼 가치관에 대한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더라도, 가족의 끈끈한 유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혈연도 아니고 법적 승인도 아닌 돌봄임을 안다. 엄마와 그린이라는 모녀의 삶 속으로 들어온 레인과 제희는 돌봄의 연쇄 속에서 새로운 가족이 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동성애에 대한 섣부른 이해를 도모하기보다는 가족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