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타 배우로서의 인기를 누렸으나 50대에 접어든 지금은 TV 에어로빅 쇼의 진행자로 겨우 얼굴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마저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쇼의 프로듀서인 ‘하비(데니스 퀘이드)’가 그녀를 대신할 새로운 스타로 30살 이하의 젊은 여성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더 젊고 완벽한 또 다른 나를 만들어주는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알게 된다. 그 약물을 주입하자 엘리자베스의 몸에서는 ‘수(마가렛 퀄리)’라는 젊고 아름다운 분신이 태어나 엘리자베스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원형인 나와 분신인 또 다른 나는 원래 하나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일주일 씩 교대로 살아야 한다는 규칙만 지키면 엘리자베스/수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누릴 수 있다.
엘리자베스의 외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타인의 시선, 특히 남성의 여성에 대한 외모지상주의적 시선의 지나친 의식과 내재화에서 비롯된다. 주변 남성들의 찬사와 비난에 쉽게 휘둘리는 그녀는 자존감을 찾기 위해 그들이 욕망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되고자 한다. 자신의 분신인 수가 인기를 얻으며 승승장구하지만 그럴수록 엘리자베스는 만족을 넘어 묘한 질투심에 휩싸인다. 수의 화려한 삶과 자신의 비루한 삶을 비교하며 더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수가 내 유전자와 몸으로부터 나왔고 나의 더 완벽한 버전이지만, 결코 나와 일치될 수 없는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럽다.
한편, 엘리자베스의 복제품에 불과한 수의 삶은 원형인 그녀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수는 안정제 역할을 하는 엘리자베스의 골수를 뽑아서 매일 투입해야만 살 수 있기에 수의 목숨은 엘리자베스에게 달려 있다. 그럼에도 집안에 갇혀 있는 한물 간 여배우와 시간을 공평하게 나눠 써야 한다는 게 불만이다. 수는 자신의 환호 받는 삶을 더 영위하기 위해 일주일 교체 규칙을 어긴 채 엘리자베스의 골수를 허용 기준 이상으로 채취하며 그녀의 육체를 도구화한다. 그 과욕의 결과로 엘리자베스는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된다. 수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엘리자베스의 시간을 탈취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이처럼 엘리자베스와 수는 그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서로를 타자화 한다. 서로를 서로의 온전한 삶에 필요한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라 걸림돌로 여긴다. 그들은 자신의 분신/원형조차 적대시할 만큼 자기밖에 모르는 깊은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도 경쟁할 정도의 극심한 나르시시즘이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강조컨대, 엘리자베스/수의 불행은 외모와 그에 기반한 성공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서 기인한다. 영화는 외모라는 것이 한낱 살덩어리의 허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에어로빅의 선정적인 몸짓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흔들리는 엉덩이를 분절한다. 여성의 신체는 외설적인 이미지를 넘어 고기 덩어리처럼 전시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대비되고 은유된다. 새해 전야 쇼를 앞둔 수가 새로운 분신을 얻기 위해 단 1회 사용 규칙을 어긴 채 서브스턴스를 투입하자 그녀의 몸에서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태어난다. 그러나 신체의 각 부위가 엉뚱한 곳에 붙어 있는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살덩어리들의 무작위적인 조합으로 보일 뿐이다. 이로써 외모의 물질성을 과장해서 표출한다. 그럼에도 수는 경악하기는커녕 침착하게 드레스를 입고 치장을 한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패착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기 외모의 추함과 아름다움의 구분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한 나르시시즘에 잠식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그 나르시시즘 안에서 소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