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2025.4월호

동물들의 표정과 몸짓에 오롯이 집중하는 원초적 시간

플로우



김경태 영화평론가




애니메이션 <플로우>의 이야기는 인간이 전부 사라지고 동물들만 남겨졌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고양이’는 숲 속에 위치한 집을 홀로 지킨다. 집 앞에는 고양이를 모델로 한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고, 저 멀리에는 거대한 고양이 조각상이 산처럼 우둑하니 서있다. 집 안 책상 위에는 고양이를 스케치한 종이가 놓여있다. 아마도 고양이의 주인은 고양이에 매료된 조각가일 것이다. 인간에게 반려동물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고양이는 그 인간의 부재로 안락한 삶에서 벗어나 홀로 생존하며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여타의 야생동물들과 달리 무리 생활을 해본 적 없는 그에게는 큰 도전이다. 그와 같은 반려동물인 ‘골든 리트리버’를 비롯한 일군의 개들이 냇가로 달려와 물고기를 잡는다. 이들 역시 주인의 부재로 스스로 먹이를 구해야하는 상황이다.


때마침 어딘가에서 거대한 물살이 밀려오고, 순식간에 숲을 물로 가득 채운다. 다행히 고양이는 표류하는 배에 올라탄다. 그 배에는 배려심이 많은 ‘카피바라’, 마냥 신나서 뛰어다니는 골든 리트리버, 유리병과 거울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집착하는 ‘여우원숭이’, 고양이를 지키려다 날개를 다쳐 무리에서 쫓겨난 ‘뱀잡이수리’가 동승한다. 대홍수가 아니었으면 결코 비좁은 공간에 붙어 있지 않았을 반려동물들과 야생동물들은 함께 기약 없는 항해를 떠난다.


각자 고유한 본능과 습성을 지닌 동물들은 사소한 반목을 거친다. 갈등을 촉발하는 행동이란 인간들의 그것과 달리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뱀잡이수리는 여우원숭이가 아끼던 부표를 무심하게 배 밖으로 쳐낸다. 골든 리트리버는 고양이의 행동을 개구지게 따라한다. 고양이는 명상을 하는 여우원숭이의 꼬리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고양이가 잡아온 물고기들을 한눈을 판 사이에 다른 개들이 모두 먹어치운다. 그들의 배 옆으로 엄청난 크기의 흰수염고래가 솟구치며 지나가며 긴장감을 유발하지만 그들의 항해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물론 위기를 초래하는 행동 역시 심오한 욕망이 아니라 단순한 본성에서 비롯된다. 그 미세한 사건사고들을 거치며 그들은 조금씩 성장하고 그들의 관계는 점차 돈독해진다. 특히,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고양이는 이제 물속에서 능숙하게 물고기들을 사냥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독립적인 생존 능력을 터득하며 동료애까지 학습하는 것이다. 


<플로우>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점은 동물들이 기존의 익숙한 동물 애니메이션에서와 달리 노골적으로 의인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는 동물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애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거나 인간의 몸짓을 흉내 내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발성으로 소리로 내고 표정과 몸짓으로 소통을 한다. 지켜보는 관객 역시 인간의 언어로부터 벗어나 동물들의 미세한 표정과 몸짓의 변화에 집중하며 비언어적 소통의 과정에 동참한다. 그리하여 소통의 어려움은 탁월한 소통 수단의 부재가 아니라 상대방의 진심을 응시하려는 노력의 부족 탓이었음을 깨닫는다.


이처럼 <플로우>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을 동물의 삶에 빗댄 우화가 되기보다는 동물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이 처한 교착상태의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그동안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동물들에게 인간의 형상을 투영했다면, 이제 관객은 동물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종적인 우월함에서 내려온다. 관객은 인간의 논리와 이해, 즉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채 보다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동물들의 삶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존재와 공존하기 위한 해법을 일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