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2025.5월호

아이러니한 폭력의 연대기에 대한 내밀한 증언

올파의 딸들



김경태 영화평론가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사는 중년의 여성 ‘올파’에게는 네 명의 딸이 있다. 그런데 현재 올파 곁에는 셋째인 ‘에야’와 넷째인 ‘타이시르’만이 남아있다. 첫째인 ‘고프란’과 둘째인 ‘라흐마’는 2015년 리비아로 밀입국을 해서 신정국가 수립을 외치는 ‘다에쉬(IS)’의 조직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프란과 라흐마가 제 발로 여성 억압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소굴로 찾아들어간 것이다. 영화는 그 모순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인터뷰와 재연을 통한 내밀한 여정을 떠난다. 부재한 고프란과 라흐마를 대신할 배우들과 재연 장면에서 올파 역을 맡아줄 배우까지 섭외한다. 


재연은 올파의 결혼식 방면에서 시작한다. 튀니지 전통에 따라 아내는 결혼식 당일에 처녀혈을 확인받기 위해 남편과 성관계를 강제로 맺어야 한다. 올파가 이를 거부하자 언니가 남편의 강간을 독려한다. 그러나 올파는 남편의 얼굴을 가격해 터트린 코피를 침대 시트로 닦아내서 처녀혈이라며 언니에게 건넨다. 이처럼 원래 올파는 남성의 폭력에 정면으로 맞섰던 여성이었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무능할 뿐만 아니라 폭언을 일삼으며 아내와 딸들을 힘들게 한다. 올파는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며 딸들을 키웠고, 마침내 이혼을 통해 가부장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올파는 이미 가부장적 폭력성에 길들어져 버렸다. 그녀는 과도하게 딸들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그들의 신체를 엄격히 통제한다. 남성들이 자신에 가한 폭력을 그대로 딸들에게 돌려준다. 일례로, 머리를 염색한 고프란에게 달려들어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그녀가 힘없이 늘어질 때까지 빗자루로 마구 두들겨 팬다. 그 모습은 배우들을 통해 그대로 재연된다. 이외에도 딸들은 어머니가 저지른 학대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카메라 앞에서 증언한다. 올파는 곁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끔찍한 폭력의 연대기를 보고 듣는다. 그 폭력의 기원은 깊이 내재화된 여성혐오, 자기혐오라는 아이러니를 뒤집어쓴 여성혐오에 다름없다. 되물림 되는 폭력 속에서 성별의 역할은 희미해진다. 폭력은 더 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청소년 시절, 고스족 패션을 추구하던 라흐마는 교사들의 부정적 시선을 받았다. 라흐마 역시 과거의 올파처럼 억압적인 전통에 맞서는 당찬 성격이다. 참고로, 당시는 튀니지가 2010년 혁명을 통해 부패한 독재정권을 몰아낸 직후이다. 권력의 한계에 직면한 후, 국민들 사이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여성들이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리는 것을 금지했던 과거와 달리 히잡 쓰기를 독려한다. 라흐마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교리에 경도된다. 그녀에게 그것은 여성의 신체를 통제했던 폭압적 과거와 결발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녀는 눈을 제외한 여성의 전신을 가리는 니캅을 입으며 신을 절대적으로 추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온 몸을 검은 천으로 가리면서 비로소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한다. 


그러나 고프란과 라흐마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더 큰 무력을 행사한다. 가정 폭력의 희생양이 신을 내세운 숭고한 폭력을 발명하며 폭력의 극단에 선다. 그것은 폭력의 악순환을 넘어서는 폭력의 급진적 진화다. 결국 그들은 2016년에 테러 혐의로 리비아에서 체포되어 현재까지 구금되어 있다. 에야와 타시르는 언니들을 향해 양가적인 감정을 쏟아낸다. 언니들이 변해가는 불가피한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차마 미워할 수 없다. 오히려,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동생들의 변치 않는 사랑은 언니들을 폭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한편, 고프란은 감옥에서 어린 딸을 키운다. 카메라는 그 딸의 얼굴을 느린 줌으로 클로즈업하며 한참을 응시한다. 아직 날것의 폭력을 마주하지 않은 무구한 눈빛의 딸은 반복되는 폭력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