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레미(펠릭스 키실)’는 자신이 일했던 빵집 사장의 부고를 듣고 시골인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부인인 ‘마르틴’과 제레미의 친구이기도 한 아들 ‘뱅상’이 그를 반겨준다. 제레미는 장례식을 치른 후 곧바로 떠나려했으나 마르틴이 붙잡아 하룻밤을 묵는다. 다음날이 되었지만 제레미는 떠나지 않고 외로운 마르틴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뱅상은 그런 그를 수상쩍게 여기며 어서 마을을 떠나라고 경고한다. 뱅상은 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어머니 곁에 머문다고 생각한다. 결국 제레미는 우발적으로 뱅상을 살해한다.
제레미는 어린 시절에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 ‘왈테르’에게도 먼저 살갑게 다가간다. 의아해하던 왈테르는 그와 술을 마시며 이내 마음을 연다. 그런데 제레미가 왈테르의 속옷을 주워 입고서 그의 가슴을 만지며 유혹한다. 당황한 왈테르는 총으로 위협하며 그를 내쫓는다. 그러나 이후에 제레미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며 다시 친구로 받아들인다. 제레미에게 있어 왈테르와 자고 싶은 욕망은 누군가 게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는지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그에게 성적인 접촉의 욕망은 상대의 성별이나 성정체성과 관계없이 정서적 교감에서 기인할 뿐이다. 알고 보니, 과거 제레미는 빵집 사장을 흠모했었고 그 사실을 마르틴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제레미는 스스로를 게이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3년 넘게 사귄 여자 친구도 있고, 현재 마르틴과도 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제레미는 여성과 남성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성적 긴장감을 분출한다.
한편, 마을 성당의 노신부는 감시하듯 제레미의 주변을 맴돈다. 제레미가 감옥에 간다고 해서 뱅상이 살아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죄책감에 시달리던 제레미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려하자 그를 말리며 양심의 가책과 타협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며 어리든 늙었든, 아프든 건강하든 누구나 언젠가 예상치 못하게 죽는다. 살인 역시 죽음의 여러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불가피한 죽음 앞에서 그 방식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우열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노신부는 제레미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의 자살을 막는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달라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는 것뿐이다. 그가 설파하는 반인본주의적이고 염세적인 궤변은 뜻밖에도 한 남자를 향한 지순하고 애틋한 사랑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일반적인 상식 수준을 벗어난다. 친밀한 관계에 대한 열망이 이성적 판단과 인간적 도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모든 행위의 목적은 관계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래서 모든 정황이 제레미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되려 제레미를 지키려한다.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경찰은 한밤중에 몰래 문을 따고 들어가서는 침대에 누워있는 제레미를 불법적으로 심문한다. 그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해 사건 날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말한 노신부는 경찰의 방문을 예상하고 옷을 벗은 채 그와 나란히 눕는다. 경찰은 노신부의 발기한 성기를 보고서야 물러난다. 즉 경찰이 제레미를 용의선상에서 배제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 친밀한 관계의 진실성이다.
성적인 접촉은 정체성에서 미끄러진 채 친밀한 관계 맺기의 수단으로 전유되고, 그 친밀한 관계 맺기를 향한 갈망은 그 모든 양심과 도덕을 추월한 채 우위에 선다. 결과적으로, 제레미는 뱅상의 빈자리를 보다 나은 방식으로 채운다. 마르틴은 무뚝뚝한 아들을 잃어버린 대신에 남편을 대체할 살가운 남자를 얻었고, 노신부는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얻었다. 왈테르도 절친인 뱅상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제레미의 구애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친밀성에 대한 전복적이고 급진적 사유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