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내부에서 시작한다. 운전하는 ‘에크발’은 조수석에 앉은 아내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뒷좌석에 탄 어린 딸은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그들은 여느 가족처럼 단란하고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길을 건너던 들개를 차로 치면서 분위기는 싸늘해진다. 에크발은 차에서 내려 죽어가는 들개를 살피지만 카메라는 오직 그의 겁에 질린 얼굴만을 담는다. 애써 죽어가는 짐승의 모습으로 관객에게 동정심이나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인간이 모는 자동차에 치여 들개가 죽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최소한의 책임에는 감정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은 지은 죄의 크기를 묻지 않으며 다만 잘못을 인정할 근본적 자세를 요구한다. 에크발은 들개를 죽였다는 딸의 비난에도 침묵하고, 오히려 그의 아내가 그저 사고였을 뿐이며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옹호한다. 악의 평범성은 신의 이름으로 만연하다. 체제 뒤에 숨은 개인은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
‘바히드’는 성실한 노동자이지만 체불된 월급을 받고자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로 인해 약혼녀는 자살을 하고 그는 평생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후유증을 얻게 되었다. 그 고문을 담당했던 경찰이 바로 에크발이다. 에크발은 시리아 전쟁에 참전해서 오른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차고 있다. 바히드는 당시 눈을 가려서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의족 특유의 삐거덕 거리는 소리는 수년이 흘러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아크발을 납치해 땅에 묻어버리려고 했지만 그가 정말 아크발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처럼 고문당한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다.
그중 ‘시바’는 그의 땀냄새를 맡으며 그가 에크발임을 조심스레 추측하고. ‘하미드’는 그의 왼쪽 다리에 난 흉터를 만지며 에크발임을 직감해 그를 죽이려 달려든다. 그들은 청각과 후각, 촉각 등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활용하며 점차 그가 에크발임을 확신한다. 비록 그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끔찍한 상황 속에서 다른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그들은 그를 온몸으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온몸으로 각인된 고통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에크발이 아니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이제 그들은 악인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윤리적 질문과 마주한다. 하미드는 그를 당장 묻어버리자고 하지만 시바는 그가 우리를 죽인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와중에 함께 에크발 아내의 출산을 돕기까지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손발을 묶은 에크발을 대신해 그의 가족을 지킨다. 그들의 원한은 오롯이 에크발에게만 한정된다. 그러나 그는 신과 최고 지도자를 따르는 게 사명이며 따라서 자신의 죽음은 순교가 될 거라고 단언한다. 시바는 에크발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가린 그에게 귓속말로 쓰레기에 불과하다며 노골적인 저주를 퍼붓는다. 그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복수의 방법은 그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시키는 것이다.
얼굴 없이 귓가를 울리는 생생한 인간의 목소리는 형체 없는 신의 목소리를 몰아낸다. 그것의 일종의 퇴마 의식이다. 더 이상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신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바히드는 에크발이 나중에 자신을 찾아낼 위험을 감수하며 그를 풀어준다. 그러나 영화는 바히드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에크발이 정말로 반성했다고 쉬이 확신하지 않는다. 다만, 용서라는 것은 그 모든 두려움을 끌어안고 견뎌낼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용서야말로 신이 아닌 인간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숭고한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