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2026.1월호

유한한 삶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

척의 일생



김경태 영화평론가


 


<척의 일생>은 개인을 우주에 빗대는 우화이다. 죽음을 앞둔 어느 범상한 인간의 삶을 돌아보는 서사가 3장에서 시작해 역순으로 진행되는 플롯 구성과 여러 장르를 교차시키는 혼종성을 통해 독특한 정취를 이끌어낸다. 영화는 39살의 회계사인 ‘척(톰 히들스턴)’이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 출발해 그의 삶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종말이 임박한 상황이 주는 음습함과 미지의 대상이 환기시키는 공포, 뮤지컬 시퀀스의 커플 댄스가 불러오는 경쾌함을 오가며 장르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유한한 인간의 삶을 응원하도록 이끄는 정서적 자양분이 된다.


첫 번째 장에서는 제3자의 시선에서 척을 응시한다. 교사인 ‘마티(추이텔 에지오포)’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월트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나는 크다, 내 안에는 다수의 것들이 들어있다’라는 구절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다.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지진으로 거대한 땅덩어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다. 지구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동요한다.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찬미하는 시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의 유한성을 목격하고 있다. 영화는 인간이 지구를 무분별하게 착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지구의 끝이 인간 탓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애초에 그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구의 종말은 150억 년이라는 우주의 역사 속에서 예정된 숙명일 뿐이다. 그것은 곧 인간 삶의 유한성과 공명한다.


때마침 동네 곳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척이라는 인물의 39년간의 삶을 치하하는 광고판이 등장한다. 추측건대, 끝을 준비하는 그곳은 척이 구축한 의식 세계이다. 지구의 임박한 종말은 투병 중인 척의 임박한 죽음이었다. 마티는 마지막 순간을 이혼했지만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펠리샤’와 보내고자 한다. 온 도시의 불이 꺼지고 하늘의 별들마저 하나둘씩 소멸한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오로지 척의 광고들만이 빛을 내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척의 마지막 남은 한줌의 의식일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척이 병으로 쓰러지기 전에 경험했던 잊지 못할 순간, 혹은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싶은 순간을 묘사한다. 그는 거리 공연의 드럼 비트에 맞춰 홀린 듯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처음 본 여성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춤을 춘다. 춤이 끝난 후, 그녀의 삶의 용기를 불어넣는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춤 하나가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왜 자신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를 자문한다. 아마도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에게 가장 그리운 순간은 음악에 몸을 맡기며 함께 췄던 춤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그가 춤과 처음으로 조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끈다. 그 춤은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첫사랑의 설렘으로 수렴된다. 춤은 그 안에 존재하는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촉매제였다.


척은 부모와 뱃속의 여동생을 사고로 잃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조부모의 집에는 굳게 잠겨 있는 다락방이 있었고 조부모는 유령이 나온다는 이유로 그 방 출입을 금지했다. 척은 그들이 모두 죽은 후에야 다락방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어느 미래에 맞이할 죽음의 순간을 환영처럼 목격하고 만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되새기며 삶의 의지를 다진다. 휘트먼의 시가 상기시키듯,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이며 그 안에는 무수한 것들이 깃들어 있다. 영화는 삶의 유한성에 순응하면서 삶을 긍정하고, 끝이 있는 유한한 삶을 전제로 인간에 내재한 무한하고 다면적인 세계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