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나는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선생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월부로 처음 산 책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일곱 권짜리 전집이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될 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 시작해서 방학이 끝날 때 나는 전집 일곱 권을 다 읽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길에 나섰다. 그때였다. 마을 앞 강물이 저곳으로 흐른다는 것을, 강가의 검은 바위들을, 강 언덕의 느티나무를, 앞산과 뒷산 산 능선을, 농부들의 발걸음을, 처음처럼 바라보았다. 내가 사는 마을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그 신비로운 첫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책방이 없는 곳에 사는 나에게 월부책 아저씨는 나의 책방이었다. 아저씨는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프리드리히 니체, 서정주, 박목월, 이어령 전집까지 가져왔다. 내 나이 스물 대여섯쯤 전주에 처음 갔다. 헌책방이 많았다. 헌책을 팔다니? 책은 한 권에 몇백 원이었다. 방학이 되면 나는 커다란 가방이 미어지게 헌책을 사서, 1시간 반 버스를 타고 시골 정류장에 내려 미리 가져다 놓은 지게에 책을 짊어지고 30분쯤 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책은 수많은 생각을 일으켰다. 그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5, 6년쯤 지난 어느 날 내가 시를 쓰고 있어서 놀랐다. 세상에 내가 시를 쓰다니, 그런데 내가 쓴 시가 무슨 말인지 나도 몰랐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쓴 시를 내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1981년 11월 어느 날 내가 근무하는 초등학교 숙직실에서 나는 남도 이해하는 시 한 편을 쓰게 된다. ‘섬진강 1’이다.
그때 교사는 한 학교에 5년밖에 근무하지 못했다.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5년 근무하고, 이웃 학교로 가서 1년 있다가 다시 덕치초등학교로 돌아왔다. 5년을 다시 덕치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이웃 학교에서 1년 있다가 다시 덕치초등학교로, 그렇게 다섯 번 다른 학교로 갔다가 여섯 번째 돌아와 6년을 근무하고 퇴직했다. 초등학교 6년, 선생으로 31년, 나는 37년 동안 덕치초등학교에서 살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강길 40분은 내 모든 문학의 근원이 되었다. 그 강길을 나는 지금도 걷고 있다.
그렇게 ‘섬진강’ 연작 몇 편이 써진 어느 날 나는 옆자리에 앉은 선생님에게 시를 보여주었다. 선생님은 놀라면서 왜 이런 시를 가지고 계시냐고 했다. ‘창작과 비평사’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시를 모아 창작과 비평사에 보냈다. 80년대 초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고, 잡지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 ‘뿌리 깊은 나무’를 강제 폐간시켰었을 때였다. 잡지는 폐간되었지만, 시인들의 시를 모은 시집은 출간하였다. 1982년이었다. 그해 10월 ‘21인 신작 시집’에 나는 시를 발표하였다.
첫 시를 쓴 지 45년이 지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시때때로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강물을 퍼가’고, 이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들이 강물을 퍼갈 텐데 나는 어느 굽이에 서서 강물을 바라볼까. 어느 날 강길을 걷는 게 귀찮아서 바람 위에 누워 흘러가다, 짧은 시 한 편을 썼다. ‘나비는 바람 위에 누워 / 흘러가네 // 날개는 // 그곳을 상상하지 않으면서 / 흘러만 가네’
어제는 오늘이 간 날이고, 지금도 아까가 될 것이다. 세상에 ‘처음’이 아닐 때 없다. 사는 것이 다 처음이다. 처음을 만나기 싫어서 나는 ‘바람 위에 누운 나비’로 허무 위에 편하게 누워 흐르기도 한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1
김용택
임실 진메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1982년 섬진강을 담은 시로 등단, 시를 쓰며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다. 덕치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했으며 지금도 그곳에 살며 강을 걷고 시를 쓴다. 시집 《섬진강》, 《모두가 첫날처럼》, 《그때가 배고프지 않은 지금이었으면》 등이 있다.
ㅣ나의 처음ㅣ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습니다. 세상에 처음 나온 날, 처음 학교에 가던 날,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날. 새롭게 연재하는 <나의 처음>에서는 우리 곁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처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첫 시를 쓰던 밤, 첫 무대에 올랐던 순간, 첫 작품을 선보이던 날. 서툴지만 가장 진심에 가까웠던 그때의 기록이 누군가의 '처음'에 용기와 응원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