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두, 꼭두!’(1993.10) 공연 리플렛
어느 날 티브이를 보다가 낯선 다큐프로그램에 마음이 꽂혔다. 사할린 동포, 몇십 년만의 귀향 대충 이런 제목이었을 것이다. 1991년 즈음이었다. 일제 말 사할린으로 징용 갔던 탄광 노동자들의 기구한 인생에 관한 내용이었다. 해방이 되었어도 일본 당국은 자기네 민족만을 귀향 조치시키고 식민지였던 조선국적의 노동자들에게는 무관심했다. 금방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좌절했고 울부짖었지만 소용없었다. 차일피일 시간이 흘러 남북한에 서로 적대적인 국가가 들어서고 이들의 귀향길은 영영 막혀버리고 말았다. 소련 정부조차 외면해버린 이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고 대부분 다시 탄광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오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소련이 개혁 개방을 선언하고 나서야 남한정부와 고르바초프 정부 사이의 대화가 트이면서 이들의 귀국길이 열렸다. 그들 중 일부는 소련인 아내를 맞이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물론 고향에 아내를 두고 떠나온 이들도 있었다. 채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식구들 곁을 떠나 돈벌러 갔던 젊은이들이 화면 속에서 칠십 노인들이 되어서 하나 둘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 누가 저들을 저리 만들었는가? 이념이란, 국가란, 체제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 알량한 이름으로 한 개인의 인생을 저리도 갈기갈기 찢어놓는단 말인가?
슬프고 기구한 사할린 동포들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들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담아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대의 아픔을 다시 한번 외면하는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저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마다 봄 시즌이 되면 연극판은 전국연극제에 나갈 팀을 뽑느라 술렁거렸다. 전국연극제는 지역 예선을 거쳐 전국의 시도 대표팀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 경연을 펼치는 형식이었다. 최우수작품상에는 대통령상이 주어지는, 전국의 연극계가 손꼽아 기다리는 연중 최대의 행사였다. 나는 그때 창작극회의 대표를 맡고 있었다. 1990년 가을에 지역의 젊은 연극인들이 모여서 재창단을 선언한 창작극회는 92년 봄에 한 차례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뒤 약간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93년 1월 무렵 극단은 그 해 연극제에 다시 참가하기로 결의를 했다. 그것도 창작초연작으로 예선에 도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창작초연작이어야 본선에서의 수상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불문율 때문이었다. 대본과 연출 모두 대표가 맡기로 했다. 나는 대본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은 짧고 갈 길은 멀었다. 몇 차례 희곡을 써보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완성물을 내본 적이 없었던 터라 내심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때 사할린 동포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뇌리를 스쳤다. 충분히 연극적인 소재였고 가치도 의미도 두루 잡을 수 있는 소재였지만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은 밋밋해 보였다. 며칠을 궁리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던 어느 날 전통인형극 꼭두각시 이야기가 불쑥 떠올랐다.
꼭두각시놀음의 주인공 꼭두각시는 집 나가서 평생 유랑 중인 남편 박첨지를 찾아 나선 참이다. 박첨지는 집에 돌아갈 궁리는 안 한 채 젊은 첩 덜머리집과 희희낙락한다. 마침내 조우한 이들은 티격태격 다투다가 사사건건 덜머리집 편을 드는 박첨지 때문에 분통이 터진 꼭두각시가 싸움 끝에 죽고 만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박첨지가 본부인을 붙들고 통곡한다. 전형적인 처첩갈등의 삼각관계를 익살맞게 그려내고 있는 이 이야기가 왜 떠올랐을까? 젊은 나이에 집을 떠나 평생 돌아오지 못 하는 박첨지의 이미지가 사할린에 붙들린 채 평생 집에 못 오는 동포 노인들의 이미지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꼭두각시는 집에 두고 간 어린 아내, 덜머리집은 소련에서 결혼한 소련인 아내와 그 역할이 비슷했다. 무대는 이중으로 꾸미기로 하고 정면의 전통적인 본무대와 별도로 하수(下手) 끝에 인형극 무대를 조그맣게 배치하기로 했다. 인형극의 진행은 악사들 중의 장구잽이 산받이가 맡아서 하고 주로 꼭두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했다. 본무대는 남자주인공 만배의 인생유랑이 펼쳐지는 자리, 인형극에서는 고향에 남아서 어린 딸을 키우며 남편을 기다리는 여주인공 필례의 걸쭉한 입담이 펼쳐지는 자리. 이렇게 작품의 얼개가 완성되었고 나는 그 길로 바로 집필에 돌입해 일주일여 만에 초고를 들고 나올 수 있었다. 초고를 바탕으로 곧바로 연습을 시작했다. 부족한 부분은 단원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점차 메꿔나갔고 지역 예선에 올릴 무렵 공연용 연출본 ‘꼭두, 꼭두!’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으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지역 예선을 가뿐하게 통과한 ‘꼭두, 꼭두!’는 6월에 대전에서 열린 전국연극제 본선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심사평에서도 역시 기구한 현대사를 헤쳐온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통인형극의 무대와 결합하여 펼쳐보인 점을 높이 샀노라는 언급이 주를 이루었다. 가을에 서울에서 열린 초청공연에서는 만석을 이루었고 이후에도 부산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1994년에는 문예진흥원(현재 문화예술위원회의 전신)에서 발간한 [오늘의 한국문학] 희곡부분에 실림으로써 희곡작가 곽병창으로서도 공인을 받았다.
극작가로서도 연출가로서도 ‘꼭두, 꼭두!’는 나의 처음이라는 수식어에 어울린다. 변두리 연극판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하면서 나는 끊임없이 거울 없는 방에서 화장을 하는 듯한 허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작품을 통해 그 무의미성을 해소할 길을 찾고 있던 내게 이 작품은 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마도 그 짧은 영광과 환호의 기억에 붙들려서 한 평생 무대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2022년 겨울에 극단 창작극회는 창단 60주년 기념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대본을 의뢰받은 나는 창단공연 이후 전국연극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을 떠올렸고 이들 작품의 인물들을 엮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궁리를 했다. ‘꼭두, 꼭두!’의 주인공들도 당연히 다시 불러내야 했다. 만배는 수용소에서 나와 필례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소련 아내도 말년의 만배를 보러 한국에 들어왔다 간다는 후일담을 덧붙였다. 그렇게 세 주인공의 긴 서사에 매듭을 지었다. 내 인생의 처음을 장식했던 인형들이여, 누구보다 생생하던 만배, 필례, 까챠의 환영들이여, 어디서든 안녕히!
곽병창
극작부터 연기, 연출, 기획 등의 연극 일로 평생을 보냈다.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창작극회 대표, 관립예술단 무대감독,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강 건너, 안개, 숲』 , 『필례, 미친 꽃』, 『억울한 남자』 등의 희곡집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