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처음   2026.3월호

처음 그 대문 앞에 섰던 기억이 또렷하다

첫 사진전 <혜생원>


정주하 사진가·농부


혜생원(사진 정주하)



나는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몇 년 방황하다가 1978년 6월에 군에 입대했다. 많은 젊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순순히 군인이 되었다. 육군 통신병이었으며, 잘 적응을 못해 무척 힘들게 군 생활을 했다. 당시 고졸자 군인은 33개월이 복무기간이었고 대학을 1년 다녔으면 2개월을, 2년이면 4개월, 3년 이상이면 총 6개월이라는 기간을 감면해 주었다. 무척이나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국가가 제시한 이유는 대학 수업 중 교련 시간이 있기에 그렇다는 것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군법이었지만, 반항도 어려웠다. 아무튼 제대하고 어찌어찌하다가 그만, 덜컥! 대학 사진과에 입학했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4~5년 늦은 나이에 대학생이 된 것이다. 군생활을 이미 했던 입장에서는 너무도 아쉬운. 


나의 ‘대학생-活’은 군 제대 후에 시작하는 것이어서 등록금도 자취생활 비용도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다. 넉넉지 않은 부모님의 경제 사정을 알아서 걱정한 것이기도 하지만, 몇 년을 고졸자 백수로 살아왔던 터라 죄송한 마음에서였기도 했다. 대학 첫 등록금은 형이 가계수표를 끊어주어 처리했다. 그리고 안성군 공도면 내건지리 이장댁 뒤뜰 마늘밭을 빌어 사방 7자(210cm) 넓이의 작은 방을 지었다. 이 넓이가 필요했던 것은 당시 내 키가 6자 한치(184cm)를 조금 넘었기에 그랬다. 기초 공사를 한 후 시멘트 부록구(블럭)로 벽을 쌓고, 나무 가이쇼(트러스)를 얹은 후, 스레트(슬레이트)로 지붕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으나마 창문도 달고 입구 문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방의 이름을 '아우르방'이라고 지었다. 건축(?)재료는 이장님이 대주었고, 나는 노가다 실력을 뽐냈고,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살풋 도와주셨다. 문제는 방바닥이었는데, 겨울을 지내기 위해서는 온기가 필요했던 터라 무척 고민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내 처지를 ‘측은/대견’하게 생각하신 어머니께서 오래전 키우던 앙고라토끼로부터 ‘취득해/깎아’ 모아두셨던 털로 요이불을 만들어주셨다. 문제는 빠져나오는 털을 비닐로 감싸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돌아눕는 매 순간 그 빠삭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따스함은 요즘 나오는 라텍스 매트리스 못지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과 내 몸에서 나는 더운 기운이 만나 겉면에 만들어지는 지도였다. 학교 가면서 길과 연해 있는 담벼락에 널어놓으면, 마치 어린 시절 오줌싼 포대기를 장대로 받친 빨랫줄에 널었던 모양과 아주 닮아있었다. 창피하지는 않았다. 


<혜생원>은 기도원이었다. 내가 자취하던 내건지리 아우르방에서 1km쯤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었다. 처음 그 대문 앞에 섰던 기억이 또렷하다. 저녁밥을 해 먹고 산책한답시고 어슬렁거리며 산기슭을 따라 걸었다. 왼편으로는 논이 있었고, 간간이 꽂혀있는 전봇대가 반가운 한적한 곳이었다. 그 길 끄트머리에 가로로 긴 담장을 가진 건물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대문 왼쪽에 세로로 된 나무 간판이 있었고, 거기에 한글로 혜생원이라고 쓰여있었다. 그 벽 왼쪽에는 미닫이문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큰 철제 대문이 있었는데 색깔은 짙은 청색이었고 높이는 내 키보다 낮았다. 깨끔발하고 쳐다보니 그 안에 요상한? 분들이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고, 모두 저마다 바쁜 모양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곳은 ‘범상치 않은 곳’이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고, 조금은 무서웠다. 이내 발걸음을 돌려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선잠을 잔 뒤, 이튿날 주인아저씨께 물어보니 그곳이 정신병자들이 있는 ‘기도원’이란다. 




혜생원(사진 정주하)




나는 사진가였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진반을 만들어 몇몇과 나름의 작품활동을 했던 터이고, 당시 우리나라 사진계의 풍토는 ‘생활주의-리얼리즘(임응식)’이라는 스타일이 만연했다. 그로부터 나름의 세례를 받았던 터라 그곳을 본 이후, ‘작업/촬영’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그곳에 들어가 함께 섞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촬영은 막연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강렬했고, 그들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가능한 듯 보였다. 그곳을 다시 찾았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그마한 방에 소파가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건물 안쪽으로 통하는 헐렁한 문이 있었다. 마침 키가 자그마한 다부진 몸매의 아저씨가 들어왔다. 이분은 그곳에서 일하는 혜생교회 집사이며, 그를 통해 이 혜생원을 관장하는 원장님은 그 교회 장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는 2년 동안 수시로 이곳을 드나들며 참으로 많은 경험을 했다. 그분들과 대화했던 많은 이야기는 아직 머릿속에서 맴돌고, 함께 불렀던 “참새와 허수아비”도 그 옆에서 웅웅거린다. 내가 들고 들어간 담배 ‘환희, 새마을, 남대문’ 등등의 이름이 떠오르고, 짚을 ‘쎄멘종이’에 말아 피우던 ‘그’의 모습도 생생하다. 


나는 3학년이었던 1984년 6월 서울 동십자각 로터리 부근에 있는 출판문화회관 A실을 닷새간 빌렸다. 부가세 포함 44만 원을 지급했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50만 원 정도였으니 5일이면 족했다. 그리고 ‘정주하사진전’을 열었다. 혜생원에서 촬영한 사진이었다. 당시 출판한 사진집 서문(?)을 내가 직접 썼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나는 내가 본다고 하는 사실을 매우 중요시하며, 그 본 사실을 정확히 그리고 왜곡됨이 없이 표현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대상과 나와의 거리가 보다 좁혀지기를 갈구하며, 그 사이에 어떠한 이물질도 개입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나의 사진은 내가 본 것이며, 존재하는 사실이고 곧 나의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 촬영된 모든 분들께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내 임의대로 이 사진들을 발표한다. 대단히 죄송스럽고 면박 받아 마땅한 일이나 일말의 위안은, 흐르다 튀어서 잠시 쉬는 물이 죽은 물이 아니라 분명 살아있는 물이 있듯이 이 사진들이 촬영된 분들의 전부가 아니라 단지 일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부디 관대한 용서를 빈다.”


이 글에 대한 영문도 함께 실었는데, 영역은 당시 영문과 이상화 교수께서 해주셨다. 그리고 안성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빚어주신 막걸리를 ‘동기/후배’들이 차로 실어 왔고, 인천 사는 누나가 ‘소머리누른고기’를 한판 선물해 주어 오프닝을 하면서 전시장 관계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며 실컷 퍼마시고, 그날 저녁 나는 사진집 판 돈 50만 원과 니콘 FM2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미국 대사관 뒤편에서 전경들과 걸판지게 댓거리를 하고, 근처 여인숙에서 아침에 깨어나 알게 된 일이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독일 쾰른대학교 철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정주하

1958년 인천에서 태어나 독일 쾰른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땅의 소리』, 『불안, 불-안』, 『서쪽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전시를 열며 동명의 사진집을 발간했다. 완주 경천면에 귀촌해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며 완주자연지킴이연대 대표로 활동하는 등 자연을 품은 사진가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