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처음   2026.4월호

아름다움을 좇던 그 시선을 기억하다

첫 다큐멘터리 <한국의 미>


오태수 전 KBS 전주방송 총국장





방송이 하루 앞인데 편집을 끝내지 못해 초조감이 극에 달하다 꿈에서 깬다. 현실이 아니어서 안도했지만 프로그램에서 벗어난 지 30년 세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그런 강박감을 꿈속에서도 자주 받는다. 


1979년 방송 PD로 입사한 후 여러 프로그램을 전전하다가 15년 후 중견의 자리쯤 올랐을 때, 그동안의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아 “한국의 미(美)”라는 TV다큐멘터리를 맡게 되었다. 내가 원하던 ‘다큐 전문 PD’로 처음 입문한 계기였다. 직전에 했던 “6시 내고향”같은 유형은 PD끼리 팀을 이뤄 공통분모를 찾았지만 새로 맡은 다큐물은 제작자 1인에게 상당한 독립적 권한을 부여하며 창의적이고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때문에 잘 만들어야 된다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아이템을 결정하고 섭외와 현지답사, 촬영을 거치면서 전체 내용의 엮음과 메시지 유무에 숙고를 거듭해야 하고, 주야로 매달리게 되는 편집과 원고, 음악, 자막, 특수효과 등의 후반 작업까지의 대략 한 달 정도 시일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런 산고의 과정을 거쳐 방송을 하고 나면 안팎으로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했으니 압박감이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동료들끼리 ‘피 말리고(P) 더러운(D) 직책’의 ‘머리 쥐어짜고 쥐어뜯는 사람’이라는 자조적 표현을 했을까 싶다. 앞서의 내 꿈에 대한 좀 구차한 변명이다. 


나의 “한국의 미” 첫 작품은 ‘춘란(春蘭)’이었다. 난향처럼 은은한 향을 겨냥했지만 작품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의 졸작이었다. 그다음의 ‘불이문(不二門)’, 다음의 ‘토우’... 그렇고 그런 졸작의 연속이었다. 타석에 들어서서 방망이만 흔들다 퇴장한 꼴이어서 절망하였다. 그즈음 ‘어떻게 만드느냐’보다 ‘누가 만드느냐’로 바뀐 제작 환경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기둥 뒤에 숨어 지내야 했다. 나만의 시각 부재와 추상적인 것의 형상화 작업 미숙 등 전반적인 함량 미달임을 의식했기에 초기의 부적응을 빨리 털어내고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발굴 후 곧바로 보존처리 중이던 백제금동향로를 꺼내 최고 수준의 금속공예임을 규명하고, 부석사 무량수전의 수미단을 뜯어 묻혀있던 녹유전(綠釉塼)을 찾아내 녹색 유리로 깔린 화려한 법당을 시뮬레이션해 보는 등 무모한(?) 열정을 쏟기도 했다. 그런 노력 속에 점차 안정된 위치를 찾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 온 게 통상 1회 40분물의 40여 편 정도다. 




성철 스님의 다비의 만장 



그런데 행여 ‘너의 대표작이 뭐냐?’고 물어 오면, 글쎄 또 기둥 뒤에 숨어야 할 참이다. ‘한옥의 창호, 경복궁‘편처럼 잘했다고 회사와 외부에서 주는 상 몇 번 받아 본 일이 있으나 다만 부끄러울 뿐. 그래도 ‘붉은 해 서산에 걸렸다’라고 제목 붙인 것은 괜찮았다. 불교계 안팎으로 크게 추앙받던 성철 종정의 열반 소식을 듣고 시의성을 놓칠까 봐 다비 현장에 급히 뛰어들어 날 새우며 벼락같이 만든 프로그램이다. 방송 후 깐깐하던 정통 다큐 PD 출신 TV본부장이 최고 시청률까지 올렸다며 처음으로 칭찬해 줘 됐다 싶었다. 물론 우수프로그램 수상과 몇 군데 매체에서의 제작 후기 요청 등으로 조금 어깨를 펼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복사된 비디오는 억대 단위로 팔려 나가 판매부서의 수입이 고공 상승했다는 후문도 들었고.


그러나 돌아보면 간밤에 썼던 편지 같아 내 것들을 죄다 지워버리고 싶지만, 영구보존물로 분류되어 활용 되는데다 또 오락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즐기는 현실에서 그래도 ‘쓸 만한 프로그램’이었다는 격려가 있어 위로가 된다. 


세월은 흘렀고, 이제 낙향해서는 홀가분한 상태에서 수시로 주변 탐방을 하게 되는 여유가 생겼다. 고색의 화암사에서는 그곳만의 천연 안료를 찾아 나서고, 뒤 불명산 정상에 올라서는 첩첩의 깊은 산세와 능선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갈대 무성한 웅포 나루에서는 조운선 오갈 때의 배꾼과 조졸들 삶의 궤적을, 집과 지근이어서 석양 무렵 자주 찾는 미륵사지와 왕궁리 5층 석탑지에서는 철저히 망해버린 백제에 대한 연민을 화면에 풀어내고... 어느 곳을 찾아가든 처음의 다큐 PD로 회귀한 듯한 착각에 빠져 머리 안에 내키는 대로 화면을 만들다 지워버린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더는 부질없는 삿된 노욕일 뿐. 무섭도록 진화한 정보력과 기술력의 시대, 예지력 갖춘 참신한 젊은 인재들의 등장에 깜짝 놀랄 때가 잦아 그들의 능력과 역할을 기대함이 맞다.


앞서의 성철 스님 다비장. 운집한 중생들이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연화대 앞에서 시자 스님이 거화봉 들어 외치며 목이 메었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 평소 ‘나에게 속지 말라’ 일갈하던 스님의 일성이 한데 섞여 가슴을 쳤다. 처음 다큐 PD가 되어 아름다움을 좇던 그 시선 망각하지 않고 어느 날 내게 불 들어올 때까지 진실 된 일상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낮은 소망 하나 끝에 끼워 넣는다.





오태수
남원 출신으로 방송사 교양PD 생활을 거쳐 KBS 편성 주간, 전주방송국 총국장, 시청자센터장(KBS교향악단·국악관현악단 운영), 원광대 겸임 교수, 백제예술대학 교수, 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 등을 지냈다.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혼자 걷는 길』 두 권의 기행 산문집을 썼으며 익산 미륵산 자락에서 주로 채소와 나무 가꾸기, 근거리 산책과 산행 등으로 소확행의 시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