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처음   2026.5월호

거리의 그림, 나는 새로운 길에 나섰다


송만규 화가


송만규 '그날이 오면'



1993년, 서울 한복판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처음으로 열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축하를 받았다. '여운'형이 술자리를 마련했다. 얼마 만에, 아니 처음으로 그런 곳에서 마음 편히 마셔본다. 한순간에 그간의 모든 것들이 인사동의 밤하늘에 펼쳐진다. 기적처럼, 겹겹이 쌓인 삶의 순간들! 그것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댄다. 통곡을 한다.


밭 한 뙈기 제대로 갖지 못한 농촌 선비에서 도시 빈민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를 둔 나에게 미술인, 환쟁이의 길을 선택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길에 나섰다. 소년기에 서울의 미술관에서 황군벽, 장대천, 제백석(치바이스) 등 중국화가들의 그림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들의 장대한 그림들은 나에게 삶의 이정표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화가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욕심껏 서울로 진학하려 했던 계획이 실패하고 삭발을 하며 다짐했건만, 입시가 아닌 bible study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교과서에서 벗어난 내용들은 아주 흥미로웠다. 내가 세상을 잘 살았다하는 것 세 가지 중에 두 번째로 접어드는 과정이다. 70년대 박정희정권의 유신헌법, 긴급조치, 노동, 농민의 현장 등에서 예수를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늦깎이로 지역에 있는 대학을 어렵게 졸업했다. 버젓이 정규교사 자격증을 획득했으니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야만 할 형편이었으니까. 이때 금강변의 한 캠퍼스에서 만난, 먼저 졸업했기에 현직교사였던 지금의 아내와의 대화 가운데 "혼자 벌어서 살기도 하던데 만규씨는 현장으로 갔으면 좋겠다."라는 말에 서로 공감했다. 여기서 현장이란 반독재민주화전선이다. 참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 사회운동에 접근하면서 미술, 문화부문의 조직도 건설하고 연대하며 판화, 걸개그림, 깃발, 포스터, 현수막까지도 제작하고 전국적인 조직들과 연계하여 활동을 확장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결혼도 하였고 두 딸 아이도 탄생하였으나 1988년도에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하 민미련)을 조직했으며 의장직을 맡았다. 이듬해 1989년 민미련에서는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을 전국에 순회 전시하게 되었다. 77m나 되는 대서사적인 그림을 제작하고 옮겨가며 설치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7월 1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려다 무산되었고 슬라이드필름만 보내졌다. 그야말로 남북 간에 자주적인 미술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해 아내는 전교조 합법화 투쟁으로 방학하자마자 서울의 명동성당으로 단식 농성하러 떠났다. 두 아이는 친정에 맡겨놓고 갔다. 그런데 하필 그때에 민미련은 북한에 미술품 보낸 사유로 정보기관인 안기부로부터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 및 수배상황이 벌어졌다. 빈 집에 가족은 제각각...


1993년 이러한 상황들이 일단락되고, 정치적으로는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이제 민미련은 발전적 해체를 하면서 ‘사람중심'과 ‘창작중심'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로운 길에 나섰다. 나는 의장직을 맡았던 책임감에 곧바로 창작을 시작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재료가 다른, 페인트나 천을 사용하며 선전물 위주의 작업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지 위에 먹물 찍은 붓을 잡았다는 게 감개무량이다.


첫 번째 개인전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어쩌면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어 살아온 시간을 울음처럼 쏟아놓은 후에 찾아온 공허함일 수도 있겠다. 가슴앓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너무 두려웠다. 이대로 숨이 멈추는 것인가! 누구에게도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병이 몸으로도 나타났다. 


그해 다가온 겨울, 정윌 대보름 경에 가끔 찾아갔던 섬진강가에서 머물다가 새벽부터 일어나 강을 따라 걷는다. 칼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정도를 넘어 속살을 찢어버릴 정도로 갈겨댄다. 해가 솟고 물안개가 젖히고 나니, 흐르는 물이 보인다. 이 고요한 강에 저 물들은 아무렇지 않게 유유자적 평온, 평화롭게 서로가 자유롭게 간다. 그냥 아래로...... 


그 뒤로 강과 가까워졌다. 내 몸속에 새로운 가르침을 흐르게 한다. 물이, 강이, 자연의 덕목을 바라본다. 탈속(脫俗)이 아닌, 전에 누렸던 세상을 다시금 바라본다. 그간의 내 생활의 지향점은 반쪽을 메꾸려는 몸부림이었으나, 강은 자연은 이제라도 나머지 반쪽을 이해해 가며 채워나가라 한다.


오늘도 나의 강은 도심의 전시장에서 흐르고 있다. 

참 좋다! 





송만규 

전북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민주화 투쟁의 현장 출신으로, 1993년 첫 개인전 '이 바닥에 입술을 대고'를 연 이후 다수의 국내외 전시를 가졌다. 섬진강 물길의 아름다움을 한지와 수묵에 담아내며, 물과 강, 인간과의 호흡을 화두로 강물 따라 사색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