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유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늘 그 길목에 닿는다. 내가 살던 장승다리 마을은 딱 백 가구쯤 모여 사는 향교리의 중심이었다. 읍내로 가려면 제법 물살이 몰아치는 개울을 건너야 했는데, 동네 어귀에는 언제나 자전거를 탄 산림감독관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곤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가장 신나는 지름길은 철도역 울타리 밑 개구멍이었다. 풀방구리 쥐 드나들듯 그 구멍을 쏙 빠져나오면, 왼쪽으로 커다란 흙둔덕이 나타났다. 동네 어른들은 왕의 무덤이니 말무덤이니 하며 일러주었고,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위를 다람쥐처럼 밟고 뛰어놀았다. 그곳이 임진왜란 의병들의 넋이 깃든 '만인의총'이 되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열 살 소년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슴 뛰는 날은 할머니를 따라 장날 구경을 가는 날이었다. 교가에도 나오던 교룡산 자락을 넘어, 할머니의 트고 까칠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을 잡고 나서는 길. 그것은 할머니와 함께 채워온 내 유년의 가장 온기 어린 삶이었다.
한번은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가는 길에, 냇가에서 거대한 상여행렬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거친 삼베옷을 입은 상여꾼들이 구슬픈 곡소리를 내며 여울목에 다다랐다. 물살이 세찬 돌다리 위, 상여꾼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상여를 수평으로 바르게 세운 채 몸을 바깥쪽으로 45도씩 뉘었다. 좁은 돌다리 하나에 두 사람씩 의지하며 거대한 V자 모양으로 대열을 좁혀 건너는 모습은, 어린 눈에 두렵고도 경이로운 서커스 같았다.
상여가 지나간 자리에 유대꾼들을 위해 짚으로 엮어 만든 임시 다리가 남으면, 나와 동무들은 악착같이 달려들어 짚방석을 파헤쳤다. 다리 아래 숨겨진 동전 몇 닢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상여 앞뒤로 늘어진 새끼줄 매듭마다 묶여서 바람에 펄럭이던 지전(紙錢)들이 소년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돌다리를 건너 오리쯤 걸었을까. 이끼 낀 돌들이 반쯤 허물어진 남원읍성의 성곽이 보였다. 서리 맞은 잡초들이 무너진 틈새로 고개를 숙인 서문 터를 지나 안으로 발을 들이밀면, 을씨년스럽던 공기는 순식간에 후끈한 삶의 열기로 뒤바뀌었다. 지리산 말린 당귀 향과 가마솥 장터국밥의 고소한 냄새가 코를 달랬다. 장터 마당을 가득 채운 하얀 고무신과 검은 고무신들의 물결. 뱀사골과 정령치에서 아침 이슬을 맞고 내려온 약초꾼들의 취나물과 고사리가 보기 좋게 손님을 기다렸고, 대장간에서 막 벼려 낸 서슬 푸른 낫과 호미, 산내면에서 온 반질반질한 목기들이 제자랑을 하듯 줄을 지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도 포장걸립의 컴컴한 천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장날이면 언제나 연극판이 벌어졌다. 할머니도 연극을 너무 좋아하셨다. <춘향전>, <바보와 울보>, <장화·홍련>, <박씨부인전> 등이 장날을 바꿔가며 굿판을 꾸몄다. 오늘 할머니와 함께 볼 연극은 <찢어진 자명고>였다. 무대 오른편 악사들의 대금과 징 소리가 조여오고, 무대 중앙에 놓인 거대한 자명고가 촛불 속에서 살아있는 신령처럼 일렁였다. 사랑을 위해 조국을 배신하고 저 신비한 북을 찢어야만 하는 낙랑공주의 서슬 푸른 칼날이 번쩍였을 때,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공주가 북을 찢고 채를 부수자 고구려 군대가 밀려들었고, 분노한 낙랑왕이 딸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쾅-! 둥! 둥! 둥!
거칠게 심장을 때리는 북소리 속에 가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공주와 호동왕자의 통곡 소리가 천막을 가득 채웠다. 나는 공포와 슬픔을 참지 못하고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은 채 손을 꽉 쥐었다. 할머니의 손등도 나와 함께 잘게 웅크러드는 게 느껴졌다. 슬픔이 극에 달한 순간, 거짓말처럼 막이 닫혔다.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이제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서정주 「행진곡」
해가 뉘엿뉘엿 지는 남원 장터를 할머니와 걸어 나왔다. 장터의 소음은 여전했지만, 내 귀에는 여전히 둥- 둥- 하던 둔탁한 북소리와 공주의 피 묻은 얼굴이 맴돌았다. 할머니가 치마 주머니에서 꺼내 입에 넣어준 눈깔사탕은 달콤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한 맛이 났다. 돌아보는 장터는 어느새 파장(罷場)이었다. 국밥집 천막 아래, 몇 안 남은 사람들이 저무는 하늘을 배경으로 마지막 국밥을 마시고 있었다. 열 살 소년의 가슴에 자명고의 깊은 울림을 남긴, 장승다리의 그 붉고 저물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유영대
남원 출신으로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 동대학원 문학박사를 졸업. 이후 우석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와 고려대 인문대 교수로 활동했다. 국문학자보다 판소리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국가유산청 무형유산 위원과 국립중앙극장 창극단 예술감독, 판소리학회 회장, 국악방송 사장, 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