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처음   2026.9월호

고창에서 굿 칠 일이 있으니 장구 들고 내려와라


이명훈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고창농악 상쇠 보유자


2000년, 황규언 선생님댁. 황규언과 이명훈



1991년 7월, 한여름이었다. 스물셋의 한 소녀는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고창으로 내려왔다. 고창터미널에서 다시 군내 버스를 갈아타고, 낯설기만 한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의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장구 하나를 달랑 메고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황톳길을 걸었다. 한 시간쯤 걸어 도착한 곳은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양사마을이었다. 마을에는 낯선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일흔두 살의 황규언 할아버지가 계셨다. 첫 만남이었다. 황규언 할아버지 댁 마루에 앉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스물셋의 나는 장구를 마주 놓고 선생님 앞에 앉았다. 그렇게 나의 고창농악 공부가 시작되었다.


일주일 동안 선생님 댁에 머물며 장구를 배웠다. 툇마루에 장구를 마주 놓고 앉아 선생님의 장구를 따라서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 가락씩 또박또박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다스름에서 이채, 동살풀이, 굿거리, 삼채가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바탕을 치셨다. 나는 그 장단을 그대로 따라 쳐야 했다. 장구가락이 겹으로 들어가서 초보자인 내가 따라가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중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가락도 많았다. 그래도 날마다 듣고, 보고, 따라 치다 보니 조금씩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장구가락은 힘이 있으면서도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 정말이지 듣기가 좋은 소리였다.


날마다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누군가는 장구를 보고, 누군가는 나를 보고, 또 누군가는 양사마을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했고,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니 무슨 말인지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그 시간이 좋았다. 그렇게 선생님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한 뜨거운 한여름의 일주일이란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1988년부터 대학 동아리에서 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졸업 후에는 문화예술운동 단체에 들어갔다. 선배들은 전국의 전통문화예술을 공부하게 했고, 자연스럽게 여러 지역의 농악을 배우게 되었다. 공부하면서 전라도 농악이 좌도와 우도로 나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고창이 우도농악의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나는 농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 고향 고창에도 농악을 하는 사람들이 살아 계실까?’ 궁금했다. 고창문화원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당시 이기화 원장님께서 황규언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장구 하나를 메고 양사마을로 갔다.


황규언 선생님께 장구를 배우고 서울로 올라온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고창에서 굿 칠 일이 있으니 장구 들고 내려와라.” 그 말을 듣고 다시 고창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1985년에 창설된 고창농악대의 어르신들을 만났다. 평균 연령이 60~70대인 어르신들이었다. 나발과 새납, 꽹과리와 징, 장구와 북, 소고, 그리고 잡색까지. 그런데 너무나 잘 치셨다. 그때까지 내가 보아왔던 농악은 대부분 흑백 영상 속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어르신들이 직접 굿을 치고 있었다. 가락이 살아 있었고, 춤이 살아 있었고, 놀음이 살아 있었다. 나는 그 굿에 홀딱 반해버렸다. 마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굿의 신세계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날, 그굿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나는 36년째 고창굿과 함께하고 있다. 내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고창의 구석구석 마을을 찾아다녔다. 마을굿을 조사하고 농악인들을 만났다. 현장에서 사라져가는 가락과 놀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미 사라져 버린 문굿과 풍장굿, 도둑잽이굿 등을 다시 복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고창농악 전수를 시작했다.


1998년 고창농악이 전북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고창농악보존회가 창립되었다. 2000년에는 폐교를 활용해 고창농악전수관을 열었다. 2001년에는 고창군 14개 읍·면 농악단을 조직했고, 2003년에는 고창굿 한마당 축제를 기획하여 서울에 고창농악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진 고창농악은 조금씩 더 많은 사람에게 이어졌다. 이제는 수많은 사람이 고창농악을 배우기 위해 고창을 찾는다. 고창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친구들도 수천 명이 되었다.


무형의 문화유산은 그렇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이어진다. 책으로만 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악보만으로 남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한 사람의 몸짓에서 다른 사람의 몸짓으로, 한 사람의 장단에서 다른 사람의 장단으로 이어진다. 황규언 선생님을 비롯해 먼저 세상을 떠나신 고창농악의 원로 선생님들이 남겨주신 소리는 이제 또 다른 사람들의 몸을 통해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고창농악보존회원들, 고창군 14개 읍·면 농악단, 고창의 초·중·고 농악부 학생들, 그리고 전국에서 고창농악을 배우러 오는 수많은 전수생. 그들은 오늘도 장구를 메고, 꽹과리를 들고, 북과 징을 치며 그 길을 걷고 있다.


돌이켜보면 고창농악의 원로 어르신들 대에서 끊길 뻔했던 고창농악은 한여름 황톳길에서 다시 이어졌다. 1991년, 장구 하나를 메고 걸었던 그 길.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그 황톳길 끝에서 나는 한 사람의 장구 소리를 만났다. 그리고 그 소리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스물셋의 소녀는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장구 소리를 들으면 그날의 황톳길이 떠오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길. 그 길 끝에서 만난 고창농악. 그것이 나의 처음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었다.





이명훈 

30년 이상 고창농악을 이어온 고창농악 보유자이자 상쇠. 1991년 성송면 양사마을 황규언 선생을 만나 고창농악에 입문했다. 고창농악전수관장과 고창농악보존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창농악보존회에서 활동하며 교육과 공연을 통해 고창농악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