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4월호 통권 제 59호
33년 전 이맘때 쯤인 1993년 3월 22일, 서예가의 붓이 멈췄다. 지역의 큰 어른이자 서예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석전 황욱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문화저널 기사는 선생을 '이 시대의 정신적 보루'라고 명명했다. 올곧은 삶의 태도와 한계를 넘어섰던 의지와 열정. 선생이 견지했던 정신과 태도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석전 선생은 1898년 전북 고창군 성내면에서 태어났다. 평해 황씨 가문으로, 조선 후기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 이재 황윤석의 7대손이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서예에 익숙했던 선생은 서울 중앙고보에서 신학문을 접했지만, 끝내 학업을 내려놓고 귀향한다. 이후 금강산 돈도암에 들어가 10여 년을 머물며 왕희지와 조맹부의 필법을 깊이 탐구했다. 세상의 흐름과 거리를 두는 선택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선생은 풍류와 시서화를 벗 삼아 묵묵히 선비의 길을 걸었다.
선생에게 서예는 순탄치 않았던 삶의 고통을 견뎌내게 해준 버팀목과도 같았다. 특히 자식들의 좌익 운동은 큰 시련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장남은 남로당 전주시당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황욱 선생이 보낸 장문의 탄원서가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고 전해진다. 차남은 의용군으로 떠났다가 월북하여 끝내 만나지 못했다.
재야에 머물던 선생의 글씨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늦은 나이에 열린 개인전 덕분이었다. 76세이던 1973년, 막내 아들 병근 씨(전 전북도립국악원장)의 권유로 전주의 ‘아담다방’을 빌려 결혼 60주년을 기념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로서는 고가였던 작품 가격에도 불구하고 25점 남짓의 출품작이 모두 판매되고, 구입 문의가 밀려들었다.

이듬해 동아일보 주최로 문예진흥원에서 열린 초대전은 한국 서단을 뒤흔들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1981), 롯데미술관(1983), 호암아트홀(1988)에서 초대전이 이어졌고, 1993년 예술의전당에서 회고전이 열리며 선생은 한국 서예의 대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선생의 필적은 지역을 넘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전주 오목대와 한벽당, 고창 계산서원과 고창읍성,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정읍 무성서원, 구례 화엄사 일주문, 경주 불국사 종각 등에서도 선생을 만난다.
석전 선생이 오늘날까지 존경받으며 한국 서단의 거목으로 우뚝 서게 한 배경에는 특유의 '악필법'이 있다. 1965년, 68세 무렵부터 수전증이 시작되자 선생은 손바닥 전체로 붓을 쥐고 꼭지 부분을 엄지로 눌러 고정하는 ‘악필법’을 창안했다. 이 필법은 지금까지 한국 서예 사상 가장 독창적인 서체로 평가 받고 있다.
선생은 1984년 오른손의 증세가 악화되자 왼손으로 쓰는 ‘좌수악필’로 다시 길을 열었다. 몸의 한계를 이유로 물러서지 않았던 선생의 태도는 득도에 가까웠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던 날, 손자 성재 황방연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조부의 서예 맥을 잇고 있는 그 역시 한국 서단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는 선생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석전기념실’이 마련되어 있다. 아들 황병근 씨가 선생이 남긴 유작을 기증해 조성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선생의 친필 서예와 유품, 생전 영상 등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선생이 곁에 두었던 서책과 서예 도구는 물론 연주하던 거문고와 가야금도 함께 전시되어 정악을 연주하고 즐기며 시조를 읊던 예인의 삶을 만날 수 있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