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 사람들>의 첫 주인공은 전주시립국악단의 '악보계', 강솔잎 씨다. 악보계는 관현악단이나 합창단 등 악단에서 악보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악보를 관리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강 씨는 2015년 입단해 악보계로 일한 지 10년이 되었다. 1979년 창단한 전주시립국악단에서 악보계로 일하는 것은 강 씨가 세 번째다. 전주시립국악단 악보실에서 그를 만났다.
까만 음표가 선율이 되려면
"예를 들어 신년음악회를 할 시기가 돌아왔다고 하면, 국악단에서 회의를 열어요. 공연의 전체적인 주제가 정해지면 어떤 곡을 할 건지 세부적인 프로그램을 논의하죠. 보통 한 번 공연할 때 다섯 곡 정도를 하거든요. 그러면 이제 그 악보를 제가 구해야 되는 거죠. 작곡가의 연락처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 곡을 연주했던 단체나 악보 전문 출판사에 수소문해서 받기도 해요." 그가 소개한 악보계의 역할이다.
악보계는 악보가 오면 단원들이 보기 좋게, 또 공연 중에는 악보를 넘기기 편하게 세심히 편집하여 인쇄한다. 악보가 없이 음원만 남아있는 경우 받아쓰기하듯 악보화하는 '채보' 업무도 더해진다. 어떤 명창이 불렀던 판소리의 한 대목에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공연 중에는 백스테이지에 대기한다. 협연자와 국악단이 연주하는 키가 맞지 않거나, 악보가 물에 젖는 등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면 곧바로 악보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악관현악단 악보계는 서양 오케스트라의 악보계와는 조금 다를 것 같기도 해요. 그쪽은 보통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이미 사후 100년이 넘은 분들의 곡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국악은 관현악이라는 개념이 생긴지 오래되지 않았고, 국악 작곡을 전공한 사람들이 창작 활동을 한지는 더욱 얼마 되지 않았죠. 유명한 작곡가분들이 다 살아계시고, 젊은 작곡가들도 끊임없이 데뷔해요. 새로운 악보가 계속해 나오고 있어요."
악보계는 악단의 사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악보계를 영어로 하면 'librarian'. 새로운 악보들이 들어오면 다시 연주할 일이 없는 악보들은 덜어내기도 한다. 그동안 공연했던 악보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악보실은 도서관 보존서가와도 느낌이 비슷하다.
강씨에게는 인상 깊게 남은 일이 있다. 국악단 이사 중 겪었던 일이다. 악보가 워낙 많다보니 정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관현악단 단원들이 함께 나서 해결할 수 있었다.
변화하는 악보계의 하루
악보계의 역할 중에는 편·작곡도 있다. 강씨 역시 작곡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어서, 종종 국악단에서 그의 곡을 초연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그는 전주예고를 거쳐 이화여대에서 국악으로 작곡을 전공했다. 대학원(홍익대)에서는 뮤지컬의 대중적 인기의 비결이 궁금하여 뮤지컬 작곡으로 석사 과정을 밟았다. 2022년에는 작곡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아르코한국창작음악제 국악부문 초연 작품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전의 악보계들은 단순히 악보 프린트만 하면 됐다고 해요. 음악 전공이 아닌 사람도 할 수 있는 직업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악보계를 채용하는 공고에 '작·편곡 가능한 자'가 더해지기 시작했어요. 악단이 악보계에 요구하는 업무가 늘어나면서, '악보계'라는 명칭을 조금 더 전문적인 느낌으로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어요."
또 하나의 변화는 악보에 대한 저작권 인식이다. 악보에도 저마다의 작곡가와 출판사가 있다. 과거에는 서로 품앗이하듯 악보를 나눠 공연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현대에 이르러 창작물 보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며 저작권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때문에 요즘은 악보 사용료를 지급해도 악보 제작 프로그램의 파일 원본이 아닌 인쇄물로만 제공되는 추세다. 작곡가에 따라 공연 이후 악보 폐기를 요청하거나, 아예 워터마크가 삽입된 악보를 주는 경우도 있다.
무대의 시작과 끝에서
강 씨는 공연 프로그램이 정해지면 가장 먼저 움직인다. 악보가 없으면 연습이 시작되지 않고, 공연을 무대에 올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단원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지나다니며 악보를 걷는다. 공연의 시작과 끝에 그가 있다. 무대 위 연주자와 지휘자가 악보를 넘길 때, 그 뒤편에는 강 씨와 같은 악보계가 있다. 그의 역할로 무대가 더 원활하게 이어지는 셈이다.
글ㆍ사진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