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백스테이지, 거울 앞 나란히 앉은 배우들. 그의 손이 한 차례 지나가면 평범했던 한 사람도 연극 속 등장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강지영 무대분장사의 이야기다. 강 씨는 연극을 위주로 국악, 오페라, 뮤지컬 등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넘게 전북 공연 현장을 누벼온 배테랑 무대분장사다. 배우의 얼굴에 스며들어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그 손끝의 이야기를 전한다.
지역 무대분장의 문을 열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연극. 그의 눈에 무대 위 사람들은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이후 매일같이 연극을 보며 극단에 드나들었고, 연극인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났다. 직접 무대에 오르기 보다는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해줄 전문 스태프에 더욱 눈길이 갔다. 마침 국내에 메이크업 붐이 일어 학원이 생겨나던 때였다. 무대분장사를 꿈꾸며 대학 진학 대신 서울에 올라가 1년간 분장 공부에 매진했다.
1993년 서울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개관 기념 공연이 그의 첫 작품이었다. 서울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지역 연극인 선배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고민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전북은 전문 분장의 개념조차 희박한 상황이었다. 신입 분장사의 경우 분장팀에 들어가 보조로 일하며 경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는 앞에서 끌어주는 선배 한 명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초반에는 웃지 못할 사고도 있었다.
도립국악원의 공연 중 심봉사가 개울물에 빠져 스님과 만나는 장면이 있었어요. 심봉사가 상투를 바꿔 써야 하는데 급하게 하다가 고정이 제대로 안 된 거예요. 무대에 내려갔다 올라갈 때마다 상투가 있다가, 없다가... 지금 생각하면 웃긴 에피소드지만 당시에는 정말 아찔했죠.
경험이 쌓일수록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뒤늦게 대학에 입학하여 더욱 깊게 분장을 배우고, 의상디자인도 함께 공부했다. 이후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마쳤으며 30년의 경력이 쌓인 지금도 무대에 대한 애정으로 배움을 계속하고 있다.
배우들의 변신을 돕는 조력자
그는 화장이 오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라면 분장은 캐릭터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인물의 나이, 인종, 성격, 사회적 위치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대극의 수염 하나에도 무관인지 문관인지에 따라 차이를 둔다. 흥부전의 흥부와 놀부의 수염도 달리해야 한다. 이렇게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써야 각 캐릭터의 개성이 살아난다.
공연이 정해지면 가장 먼저 대본을 읽고 분석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후 배우들의 연습을 참관하고 연출가와의 상의를 통해 콘셉트를 잡아간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분장과 작품의 조화다. 돋보여야 하는 것은 무대와 배우이지, 분장사 개인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다. 그래야 배우들이 극 중 캐릭터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 또한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먼 대극장의 경우 배우의 이목구비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윤곽을 살리는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최종 분장을 완성한다.
배우들에게 분장이란 평소의 나에서 극 중 인물로 변하는 과정이잖아요. 그래서 분장이 잘 돼야 연기도 잘 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요. 가끔 '어차피 잘 안 보이는데 굳이 해야 하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대충 해달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요. 저를 배려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속상하죠. 배우한테 연기 대충하라는 이야기는 안 하잖아요. 저한테는 이게 일이고, 직업인데 어떻게 대충하겠어요.
무대분장은 공연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만 아직도 그 중요성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분장실이 생겨나고 분장비 기준이 마련되는 등 환경은 크게 나아졌으나, 공연 예산이 부족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여전히 분장이다. 그는 언젠가 분장이 공연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진심을 담아 분장을 완성해 나간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