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 사람들  2025.5월호

그림을 완성하는 빛나는 조연

동문액자 이승헌 대표 




하나의 그림이 전시장에 걸릴 때, 그림을 품은 액자까지가 곧 작품의 완성이다. 그러나 액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미술의 세계에서 액자는 없어서는 안 되지만 주인공이 되어서도 안 되는, 영원한 조연의 운명을 타고났다. 비록 조연일지라도, 그림과 운명을 같이하는 액자는 작품을 돋보이게 만드는 중요한 존재다. 전주 동문액자의 대표 이승헌 씨는 30년 세월 묵묵히 빛나는 조연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의 손이 만들어낸 네모난 틀 안에서 수많은 그림이 완성되고 있다.


좋은 액자란 그림과 궁합이 잘 맞는 것 

동문액자의 모든 작업은 작가들의 주문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림이 없으면 액자도 없는 셈이다. 이 대표는 액자를 만드는 일이 우리가 옷을 입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림이 화려하면 액자도 그만큼 화려하게, 그림이 돋보여야할 때는 단조로운 액자로 옷을 입힌다. 주로 나무를 재료로 하는 그의 액자는 특별한 기술보다도 섬세함을 필요로 한다. 어느 곳 하나 그림이 들뜨지 않도록 크기를 딱 맞추는 작업이 특히 중요하다. 


작업실 한쪽에는 1977년에 제작해 무려 50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액자가 있다. 요즘에는 잘 쓰이지 않는 화려한 무늬로 조각되어 앤티크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당시만 해도 액자의 무늬는 하나하나 손으로 조각해 만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투박하면서도 동시에 정교한 멋이 난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며 유행도 변하고, 다양한 모양으로 가공된 제품이 나오며 더 이상 일일이 조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기술이 발전한 만큼 작업은 편리해졌지만 다른 분야에 비하면 제작자의 기능이나 예술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처음 이 일을 배울 때만 해도 톱으로 나무를 잘라서 만들었는데 요즘은 기계로 다 해버리니까요. 액자라는 분야가 조금 얄팍하지요. 액자 자체로 멋지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그저 그림하고 조화를 잘 이루는 액자가 좋은 액자겠죠.


 




예술가들의 영원한 사랑방

그림과 액자가 늘 함께하듯, 이 대표와 작가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액자집의 나이가 쌓인 만큼 단골손님들은 대부분 지역의 원로 작가들이다. 함께 호흡을 맞춘 시간이 길다보니 이제는 척하면 척 서로가 최고의 동료이자 단짝이다. 90년대 말, 동문액자가 처음 문을 열었던 때를 떠올리면 이곳은 예술가들의 둘도 없는 사랑방이었다. 작가들이 배고픈 시기에는 액자를 외상으로 제작해주기도 하고 반대로 이 대표가 어려운 때에는 작가들이 나서서 도우며 진한 우정을 다져왔다. 지금도 작업을 마치고 작가 선생님들과 나누는 막걸리 한잔이 그에게는 가장 큰 낙이다. 


출근 시간은 8시지만 문 닫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손님이 오면 막걸리 마시러 가야하니까요.(웃음) 저는 전시장도 다니질 못해요. 작업한 작가들 중 한 사람 전시를 가면 다른 분들 전시도 다 다녀야하니까요. 안 그러면 누군가는 서운함을 느끼게 되잖아요. 아쉽더라도 저는 작업실에서 완성된 작품을 보고 보람을 느끼는 걸로 만족해요.


현실을 마주하며 나아가는 일 

그와 액자의 인연은 형을 통해 시작되었다. 서울의 한 화방에서 일을 하던 친형은 액자 만드는 일을 배워 전주에 내려왔다. 20대의 그는 형을 따라 전주에 자리를 잡고 그렇게 액자를 만났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 이만큼이나 오래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도 액자집을 지키는 것만이 유일한 계획이고 꿈이다. 


동문길 사거리에 있던 동문액자는 한옥마을이 발전하며 10년 전쯤 전주시청 너머로 자리를 옮겼다. 30년 전만해도 주변에는 대학교와 학생들이 많아 액자집도 북적였지만 지금은 학생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액자 없는 캔버스가 벽에 걸리거나 액자가 아예 필요 없는 미디어 아트가 인기를 끌고 있는 시대다. 언젠가는 액자도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마주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려면 일단 물감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화방도 갈수록 많이 사라지고 있어요. 액자도 마찬가지죠.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경기가 가라앉으니까 저도 다른 해에 비하면 올해가 힘든 상황이에요. 그래도 가게 문은 항상 열어둬야죠. 늘 하던 대로 그냥 사는 거예요.


미국의 액자 전문가 윌리엄 베일리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액자의 기능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관람자와 그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다.” 같은 그림도 액자의 모양과 크기, 색깔에 따라 다른 감상을 전한다. 액자는 그렇게 작품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림과 우리를 조용히 연결하고 있다. 미술관에 가면 그림과 함께 액자를 바라보자. 그래야 진짜 완성된 작품을 볼 수 있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