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이 흐르는 무대 뒤에서 피아노의 뚜껑을 여는 조율사. 공연장의 하루는 그의 움직임으로 시작된다. 피아노와 대화를 나누며 하나하나 음을 조율하는 시간. 건반 아래 숨은 미세한 울림과 떨림을 놓치지 않으며 소리를 만지다 보면 피아노는 비로소 연주자를 기다리는 시간을 맞는다.
조율사는 피아니스트들이 최상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완성하는 사람이다. 익산예술의전당, 문화공간 이룸 등 다양한 공간에서 피아노 조율을 맡아온 정정모 조율사를 만났다.
소리를 고치며 지나온 50년
중학생 때였어요. 학교에 조율사 선생님이 오셔서 피아노를 만지는 걸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그때는 조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수리하는 사람이라고만 알았죠. 좌우지간 악기를 만지는 그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조율을 시작한 첫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1974년 10월 10일,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로 서울의 한 피아노 제작 회사에 입사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조율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선배들에게 “피아노를 망치려고 하느냐”는 꾸중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수천 대의 피아노를 두드리며 귀가 열렸고, 점차 아주 미세한 소리의 변화까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절대음감을 넘어선 초절대음감(?)을 가지게 된 것.
전주에 돌아온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전북 곳곳에 지금도 그가 손본 피아노들이 많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다른 일을 찾아 몇 달씩 일을 쉬어보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조율로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50년이라는 시간이 쌓였지만, 스스로 피아노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죽을 때까지 배움을 반복하며 완벽을 향해 계속 나아갈 뿐이다.
조율 도구
연주를 완성하는 섬세한 손길
피아노는 매우 예민한 악기다. 마치 인간의 몸처럼 건반, 울림판, 구리선, 해머 등 여러 부품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소리를 낸다. 그중 하나라도 틀어지면 음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습도와 온도의 변화에도 민감하여 날씨에 따라서도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 단순히 음만 잘 맞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부품들이 일정한 감도로 움직이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수리를 하는 등 총체적인 상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조율에 있어 기본적인 음의 높이는 정해져 있지만, 피아니스트마다 원하는 것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카랑카랑한 소리를, 어떤 이는 부드럽고 둥근 소리를 원한다. 하지만 공연장의 피아노는 대개 한대뿐이기에, 그들의 요구를 조금씩 반영하면서 본래 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상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대 위 음악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과정이기에 작은 것 하나라도 허투루 할 수 없다.
피아니스트들한테도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가끔 조율을 끝낸 피아노를 두고 잡음이 있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그저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하고 며칠에 걸쳐서 찾아봅니다. 그럼 결국 피아니스트가 말했던 부분이 문제가 있었던 게 맞아요. 이런 수용하는 마음이 없으면 조율을 해서는 안 되지요.
마지막 건반이 멈출 때까지
그에게는 오랜 시간 지켜온 철칙이 하나 있다. 바로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대부분의 조율사가 낮 리허설까지만 지켜보고 자리를 뜨는 데 반해, 그는 공연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무대 뒤를 지킨다. 성공적으로 연주를 마치고 손을 피아노에서 떼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긴 대기 시간이 의무인 것은 아니다. 지역 공연장의 현실을 잘 알기에, 다른 조율사들과 같은 수준의 조율비만을 받으며 봉사하는 마음으로 공연장 조율을 이어가고 있다.
조율사는 조율만 하면 끝나느냐, 그건 아닙니다. 공연 중 갑자기 피아노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조율사가 책임져야죠. 물론 지금까지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여지껏 없었다고 오늘도 괜찮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2023년 가을 익산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리사이틀. 그날도 정 조율사는 리허설이 끝난 뒤 자리를 뜨지 않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선우예권이 조율사를 찾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문제가 있나 싶어 말을 건넸다. 선우예권은 "피아노 조율이 잘 되어 있어 감사하다"는 뜻밖의 인사를 전해왔다.
그날 선우예권은 “오늘 피아노 상태가 좋아서 한 곡 더 준비했다”는 멘트와 함께 예정에 없던 라벨의 ‘라 발스’를 연주했다. 아름답게 울려 퍼진 그 선율에 관객은 큰 환호로 화답했다. 정 조율사는 그 순간의 감정이 천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전한다. 이러한 순간들이 있기에 오늘도 그는 조용히 악기를 매만진다. 건반 위의 소리가 온전히 울려 퍼지기를 바라며.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