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 사람들  2025.11월호

무대 위,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

무대미술가 이종영




객석의 불이 꺼지고 조명이 오르는 그 순간, 관객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배우나 무용수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손끝이 만들어낸 공간이 있다. 그곳은 눈에 보이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무대 뒤의 언어다. 그 언어를 만들어온 무대미술가 이종영씨. 30년 가까이 전북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무대미술가로 활동해 온 그를 만났다. 


그림이 생명력을 얻은 순간 

무대미술과의 인연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젊은 시절, 미대에 다니던 그는 종종 선배들의 작업실을 찾아 다녔다.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도 작업실 한켠 곰팡이가 핀 채 쌓여 있는 그림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무대미술은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전북대 무용학과에 재학하던 친한 친구 공연을 도운 것이 계기가 됐다. 그가 만든 무대 위의 커다란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춤을 추며 움직였다. 정지된 평면 위의 색과 선이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무대미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교육기관이 없었어요. 큰 공연장들을 무작정 찾아가서 감독님들에게 가르침을 구했죠. 현장에서 몸으로 먼저 부딪치다 보니 이론의 필요성을 느꼈고, 색채학과 재료학 등 기초부터 다시 공부했어요. 서울 을지로의 자재 거리를 놀이터 삼아 세트와 소품에 쓸 재료를 찾아다녔습니다.”


첫 작품은 1998년이었다. 이후 연극, 뮤지컬, 아이돌 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를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을 느끼는 분야는 역시 ‘무용’이다. 현실의 공간을 재현해야 하는 연극과 달리, 무용 무대는 시각적 실험이 자유롭고 상상력을 온전히 펼칠 수 있다. 무엇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몸짓과 감정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르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07년 <춤추는 춘향>으로 시작한 널마루무용단의 ‘판소리 다섯 바탕’ 시리즈다. 그는 다섯 작품의 무대를 모두 맡으며 전통 판소리를 무용으로 재해석했다. 옥에 갇힌 춘향의 목에 씌워진 칼을 거문고로 대체하는 등 한국적 상징을 시각적으로 변주하는 시도를 통해 전통의 결을 새롭게 풀어냈다.





서울시립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세종문화회관 제공)




공연의 모든 시각을 책임지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수많은 대화와 조율을 거쳐야 한다. '무대미술가'란 단순히 디자인된 도면만 넘기는 것이 아닌 의상, 조명, 소품, 공간 구성 등 모든 시각적 요소를 세밀히 고려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관객이 무대를 바라보는 순간, 각각의 요소가 하나의 감각적 경험으로 완성된다. 다만 무대미술이 주가 되면 정작 무대 위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기에, 공연 전체의 메시지를 해치지 않는 정도를 지켜야 한다.


제작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부분도 한둘이 아니다. 단 5mm만 오차가 생겨도 세트가 맞지 않거나 안전하지 않게 설치될 수 있다. 조금의 턱만 생겨도 무용수가 걸려 넘어질 수 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 점검하고, 무대가 의도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시간과 예산의 한계 때문에 아쉬운 경우가 많아요. 작년 서울시발레단 창단 공연인 <한여름 밤의 꿈>에 참여했는데, 저의 거의 모든 의견이 반영되었어요. 무대미술 예산도 웬만한 작품 하나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고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어요. 대부분 지원사업을 통해 공연이 진행되기 때문에 예산도 그렇고, 정산 시점에 맞춰 서둘러 완성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그는 한국 무대미술계의 제도적 한계를 지적한다. 유럽에서 공부하며 가장 놀랐던 점은 ‘극장 상주 미술감독’의 존재였다. 장기적으로 무대를 설계하고 실험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무대미술가가 프리랜서로 일한다. 한 작품에 깊이 있게 몰입하기가 어렵고, 다작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무대미술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하지만 무대와 움직임이 맞물려 하나의 장면이 완성되는 순간마다, 그는 여전히 그 세계의 매력을 실감한다. 그림이 무대 위에서 생명을 얻는 그 찰나를 위해, 그는 오늘도 또 다른 세계를 그려 나간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