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비평   2026.7월호

나무에 새긴 판소리, 전주에서 만난 ‘별세계’

마당창극 <별향단젼이라>


구수정 공연평론가


마당창극 <별향단젼이라>



선선한 바람이 부는 토요일 오후, 한옥마을에 초롱불이 화려하게 켜졌다. 2026년 전주브랜드 공연(마당창극)으로 <별향단젼이라>가 10월 17일까지 전주한벽문화관에서 펼쳐진다. <별향단젼이라>는 전주에서 출판된 옛 책인 ‘완판본’을 둘러싼 창극이다. 전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판소리로 보고 들을 수 있다니 궁금한 마음에 극장을 찾았다.


전주천을 끼고 기와담장 끝에 위치한 극장에서 전주의 옛 정취를 느낀다. 전주의 옛 이름은 ‘완산(完山)’으로 완판본(完板本)은 전주에서 출판된 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주의 전라감영에서는 한지를 만들던 지소(紙所), 책판을 인쇄하고 책을 만들던 인출방(印出房)이 있었다. 또 닥나무를 재배하여 각종 한지를 만들어 전국 최고의 품질과 생산량을 가졌다. 「동의보감」을 비롯한 60여 종을 출간하였으며, 수요가 넘쳐나 전라감영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출판하기 시작해 조선 후기 가장 왕성한 출판 문화를 갖게 된다. 또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에는 임진왜란 때에도 지켜낸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이 있었다. 지금의 전주 역시 제지 공장과 한지박물관, 그리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책방을 보유하고 있다니 이 지역의 책사랑은 여전하다.  


<별향단젼이라>에서 주인공 ‘윤돌’(역 전민권)은 전주 서포거리에서 완판본을 만드는 천재 각수(刻手)이다. 그가 진정한 가치를 찾아 한양으로 떠나는 과정에서 ‘상단’(역 이해원)과의 만남을 통해 완판본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별향단젼이라>는 전형적인 뮤지컬의 어법을 따른다. 극 시작에 매끄럽고 빠른 전개의 서곡(overture)을 통해 이야기의 배경을 제시하면서도 관객들의 주의를 사로잡아 몰입하게 만든다. 정령들은 퀴즈를 통해 관객과 교감하며 처음 들었을 때 선뜻 들어오지 않는 완판본[전주의 판본]과 경판본[한양의 판본]의 의미를 친절하게 전달한다.



윤돌ㅣ역 전민권



또한 완판본과 경판본의 대비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논리로 대치시키지 않아 좋았다. 극에서 경판본은 사대부, 완판본은 어린이까지 포용하는 서민의 것으로 상징화되었다. 윤돌은 경연 과정에서의 목표와 우승이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이가 절대 ‘악(惡)’은 아니었고, 그저 목표가 다를 뿐이었다. 주인공이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기보다 과정을 통해 두 가지 모두를 포용한 것처럼 느껴진다. 경판본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완판본의 넓은 수용성을 큰 가치로 여긴다. 그런 면에서 본래 추구하던 선조들의 공동체적 미학이 작품에서 드러난다.


완판본과 경판본의 대비는 음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완판본 정령과 경판본 정령의 노래를 대비하여 극적 재미를 준다. 경판본은 높은음의 가곡적인 발성을 사용하여 분위기를 반전시키면서도 조선 상층민인 사대부의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표현하였다. 엄중한 듯하면서도 해학적인 노래가 마치 탈춤의 양반 과장을 연상케 한다. 판소리는 사대부와 서민의 취향을 음악적으로도 적절히 섞어내 왔다. <별향단젼이라> 역시 조선 후기 문화적 전복과 예술 향유의 폭발적 수요가 ‘판본(책)’이라는 매체로 상징화되는데 이를 담기에 판소리는 아주 적절했다.


밤 장면에서 정령들이 산비둘기 소리를 내거나, 정령들의 도창 역할 역시 판소리 특유의 유머가 느껴진다. 이 역시 판소리의 여러 청자층을 포용하면서도 이야기의 면면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 현대 창극의 작창법에서도 유효하다.


판소리는 혼자서도 좋지만 함께일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창극의 장점은 여기에 있다. 역할을 나누어 개성 있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도 장점이 있지만, 필자는 다 함께 한목소리를 내는 떼창이야말로 창극의 진정한 힘이라고 본다. 혹자는 창극이 남성과 여성의 성부가 뚜렷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아 단조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부를 나누는 것 역시 서양의 오페라나 뒤이은 뮤지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일 뿐이다. 판소리 발성에서 발견되는 미적 관념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적인 목소리에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남자와 여자로 나눌 일이 뭐가 있을까. 소리의 공력을 쌓고 수련하는 과정은 매한가지이거늘.


이렇게 모두가 한목소리로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떼창은 명징하게 관객을 압도한다. 박인혜 연출의 전작 <오버더떼창:문전본풀이>의 청초한 떼창을 비롯하여, 국립창극단의 <보허자>의 무게감 있는 서곡 등에서 그 떼창의 효용을 느낄 수 있었다. <별향단젼이라>에서는 발랄하고도 싱그런 에너지의 떼창을 확인할 수 있다. 떼창처럼 판소리의 본질을 가져가면서도 효과적인 창극의 작법이 계속해서 시도되고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상단ㅣ역 이해원



윤돌은 상단이 품은 소중한 이야기 ‘별향단전’을 통해 성장한다. 극 속 ‘별향단전’은 춘향이의 뒤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던 우리 주변 어머니, 아내, 이웃의 이야기다. 상단은 ‘별향단전’의 향단이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 ‘남의 줄을 잡던 이가 자신의 그넷줄을 잡는’ 향단이처럼 어느 위치에 있던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개인의 이야기가 모여 서로를 존중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윤돌은 누구도 기록하지 않는 평범한 이야기를 완판본에 담는다. 주류의 이야기가 아닌 주변의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마음은 가까운 이의 공감을 통해 단단하게 엮어진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삶에서도 관통한다. <별향단젼이라>는 이렇게 여러 메시지가 중첩되고 얽히는데 그것이 아주 성글게 얽히면서 생각할 틈을 벌려 준다.


한편 완판본으로 출판된 판소리계 소설은 「열녀춘향수절가」, 「심청가」, 「심청전」, 「화룡도」, 「토별가」 등 5종이 있으며 판본이 다른 것을 합치면 50여 종류나 된다. 예향의 도시 전주에서 판소리로 ‘완판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판소리와 완판본의 만남은 전주라는 공간성이 있어 관객으로서 신비한 체험을 한 것 같다. 전주 풍남문 앞에 가면 윤돌이 같은 각수들이 ‘타닥탁’ 나무를 쪼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한다. 공연장은 한옥마을과 연결되어 있으니 공간을 공유하되 시간을 가른 별세계처럼 느껴진다. 지역과 역사를 예술 작품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의도는 드러났지만 방법이 완전히 밀착되지는 않은 점이 아쉽다. 물론 프로그램북에는 완판본문화관이 소개되었지만, 전라감영이나 경기전 등의 이차적 연결이 적극적으로 되었으면 공연이 끝난 뒤 그곳을 향해 바로 발길을 돌렸을 것 같다. 관광객은 전주 여행이 더 깊어질 수 있고, 지역 관객의 입장에서는 우리 지역의 역사와 자부심을 크게 느낄 것이다.


전주라는 도시의 스토리텔링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유명 명소와 먹거리 같은 일차적인 방식부터 한옥마을의 한복 체험, 그리고 예술적 활동 및 공연까지. 그중 공연예술은 현시점의 관광이라는 횡적 차원을 넘어 역사와 문화유산, 고유의 예술적 요소를 종적으로도 연결할 수 있는 방식이다. <별향단젼이라>는 전주를 대표하는 무대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구수정 

공연예술 평론가, 음악치료사. 음악을 매개로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에세이 『가끔은 혼자이고 싶은 너에게』,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