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저승과 현실을 오가며 인간의 영혼을 노리는 악령 ‘사자보이즈’가 등장하는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 특유의 정서를 반영한 오컬트적 설정이 바탕이다. 전 세계의 팬들에게는 낯설지만 신비로웠을 이런 한국적 세계관은 여러 설화나 고전을 통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조선 시대 금서였던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이야기다.
『설공찬전』은 귀신, 빙의, 저승 심판 등 오늘날의 판타지 서사를 연상시키는 요소로 가득하다. 이야기의 무대는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로, 이곳에 작품의 배경과 인물들을 기리는 ‘설공찬전 테마관’이 있다. 설공찬전과 그에 얽힌 순창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설공침이라는 인물의 몸에 죽은 사촌형 설공찬의 혼령이 들어와, 공침의 입을 통해 저승의 이야기를 전한다. 단순한 빙의가 아니라, 설공침의 아버지가 무당을 불러 설공찬의 영혼을 쫓으려 하자 설공찬이 격렬히 반발해 공침의 사지를 뒤틀고 눈자위를 찢어버렸다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공포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은 오래전 TV 프로그램 스펀지에서도 영화 <엑소시스트>(1975)와 비교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설위, 설충란, 설충수 등 등장인물은 모두 ‘순창 설씨’ 집안의 실제 인물이다. 글을 쓴 채수는 설공찬 어머니의 외삼촌으로, 조카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작품을 쓴 셈이다. 설충수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의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 일대이며, “공찬의 넋이 들어가면 공침이 집 뒤 살구나무 정자에 앉았다”는 구절 속 장소는 현재의 ‘삼외당(三畏堂)’으로 전해진다. 삼외당은 설공찬전테마관의 바로 뒤,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해 있다.
설공찬전테마관에서는 이러한 지리적 배경과 문중 전승 자료, 영상 콘텐츠 등을 바탕으로 『설공찬전』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실제 설씨 문중 어른의 해설을 들으며, 조선 시대에 금서로 불태워졌던 한 작품이 어떻게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되살아났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설공찬전은 단순한 귀신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불교의 윤회관을 비롯한 사후 세계관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작품 속 “임금이었더라도 반역자는 지옥에 있다”, “여인의 몸이라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소임을 맡는다”와 같은 구절은 당시 사회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특히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중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였기에, ‘반역한 임금은 지옥행’이라는 대목은 왕권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결국 채수는 파직당했고, 『설공찬전』은 금서로 지정되어 모두 불태워졌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뒤, 명종 때 문신 이문건이 남긴 『묵재일기』의 뒷면에서 몰래 필사된 원고가 발견되었다. 1996년에 세상에 알려진 이 필사본은 결말은 남아있지 않지만,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원래 한문으로 쓰였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한글 번역본이며, 『홍길동전』보다도 앞서 한글로 기록된 소설로서 국문학적 가치가 크다. 현재 테마관에서는 『묵재일기』 복제본과, 그 속에서 『설공찬전』을 발견한 이복규 교수의 관련 기증자료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설공찬전』은 저승의 이야기를 빌려 인간의 권력과 윤리를 되묻는 작품이었다. 한때는 불온한 이야기로 불태워졌지만, 지금 순창에서는 그 금서의 세계가 지역의 기억으로 다시 살아난다. 어쩌면 오늘날의 'K-판타지'보다도 더 과감하고 오래된 상상력의 원형이다. 한국의 콘텐츠가 주목받는 지금, 설공찬전의 가치가 더 새로워진다.

설공찬전 테마관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금풍로 174
10:00~18:00 (매주 일/월 휴관)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