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포럼 2023ㅣ사진 지리산이음
남원 광한루원, 임실 치즈테마파크, 순창 고추장민속마을까지. 이 도시들을 한번쯤 여행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익숙한 이름들이다. 우리는 도시를 대표하는 관광지를 통해 그 지역을 기억하곤 한다. 그러나 발을 조금만 깊숙이 내디디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닿는다.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하기도 하고, 낯선 여행자를 있는 힘껏 반겨주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작은 마을 안에서 피어난 색다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회까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알고 있던 지역도 다르게 여행할 수 있다.
‘문화로 지역 읽기’는 지역 안에서 문화의 힘을 단단히 지켜가는 사람과 공간을 전하며, 지역을 여행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 무주, 진안, 장수, 지난 호 익산과 완주에 이어 남원, 임실, 순창을 여행할 차례이다. 세 지역은 모두 귀농 귀촌 인구가 많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각자의 뿌리를 내리고 본래 그곳에 살아가던 이들과 나란히 섞이며 지역의 문화는 더욱 풍성한 가지를 뻗고 있다. 남원, 임실, 순창의 깊숙한 곳, 생생한 문화가 살아있는 곳을 들여다본다.
남원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
극단 둥지 기사 바로가기
남원은 도심을 가로지는 요천을 중심으로 관광지와 문화예술 공간이 밀집해있다. 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난 날에 맞춰, 매년 봄이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속예술 축제의 하나인 춘향제가 열린다. 판소리의 본고장답게 국립민속국악원을 두고 있으며, 지난 2018년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문을 연 이후 지역의 복합문화시설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활동을 바탕으로, 민간에서 이끄는 문화단체와 개인의 활약도 활발한 편이다. 30년이 넘는 세월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전하는 극단, 다양한 활동으로 문화적 활기를 불어넣는 독립책방들, 남원에 정착해 새로운 공간을 짓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청년들까지. 남원은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복작복작한 중심지를 벗어나면 어떨까? 남원의 읍면으로 향하면 지리산을 둘러싼 마을과 사람들이 형성한 문화가 돋보인다. 생태, 환경, 여성운동, 비건, 청년 등 몇 가지 키워드들이 이들의 삶과 문화를 어렴풋이 설명해준다. 도시에서 벗어난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고, 지리산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결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 그렇게 지역을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바꿔나가는 사람들. 이 모든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남원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리산활동가대회_지리산권 5개시군에서 온 활동가들의 교류ㅣ사진 지리산이음
남원을 비롯한 5개 시군에 걸쳐 넓은 품을 펼치고 있는 지리산. 많은 방문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산 너머에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도 있다. 지리산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를 연결하고 마을과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리산 자락에 모여 건강한 토론을 나누고, 지역민을 위한 공간을 열고, 더 나은 지역사회를 향한 콘텐츠들을 만드는 지리산이음(센터장 임현택)의 이야기다.
“남원에 오면 광한루원 주변만 스쳐가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남원 안으로 조금만 들어와 봐도 멋진 자연과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있거든요.”
산내면의 푸른 자연과 마주보고 있는 지리산이음의 아지트에는 다양한 이름이 걸려있다.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 등. 이 이름들이 모두 이곳의 정체성이 된다. 지리산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익활동을 지원하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는 지난해까지 6년째 운영해오며, 올해는 조금 새롭게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에서는 포럼이나 워크샵, 교육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리산이음의 홍보팀장이자 한 명의 활동가이기도 한 김누리 씨는 최근의 활동을 소개하며 두툼한 책 한 권을 건넸다. 이번 겨울 발간한 지역밀착형 유기농매거진 <아삭!>이다. 지리산에 닿아있는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 5개 지자체의 이야기를 한 권에 엮어 지리산에서 잘 놀고,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전한다.
김누리 홍보팀장
지리산매거진 '아삭'
“우리끼리 읽는 책이 아닌, 지리산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지리산에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고민하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걸 소문내고 싶었어요.”
책을 만든다는 소식에 각 지역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모아 전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지역마다 인연을 맺고 있는 활동가들이 직접 취재를 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활동가들은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마음으로 서슴없이 동참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손길로 페이지를 채웠다. 산청에 사는 한 기록활동가는 말했다. 지리산에 안겨 살아가는 여럿이 모여 지구와 이웃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 또 그런 이들을 어떻게든 지원하겠다고 단체를 만들고 축제를 여는 이들을 만나면 갓 딴 오이를 씹을 때처럼 아삭, 소리가 들린다고. 제 주변에 유기농 같은 사람들이 가득함을 느낀다고 말이다. ‘아삭!’이라는 잡지의 이름은 여기서 탄생했다. 전화번호부나 지도책, 여행책처럼 누구에게나 즐겁게 읽히길 바라며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올해도 해오던 활동들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일이 첫 번째지만, 특별히 계획하는 일이 있다면 마을카페 토닥의 문을 다시 여는 일이에요.”
지금의 지리산이음이 있기 전 산내 마을에는 ‘마을책방카페 토닥’이 2012년 먼저 문을 열었다. 카페 겸 독립책방으로, 마을의 사랑방이기도 한 이곳의 특별한 점은 아이들을 위한 돌봄 공간이 되었다는 점이다. 보호자가 일정 금액을 맡겨두면 아이들이 자유롭게 찾아와 코코아 한잔을 사먹고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러운 동네 문화를 형성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지나며 산내에도 카페와 어린이 공간들이 생겨났다. 토닥은 새로운 쓸모를 고민하며 2022년 잠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올해 4월, 오랜만에 토닥의 문이 다시 열린다는 소식이다. 전과 같이 주민들 사이를 연결하는 소통의 공간이 되겠다는 계획은 갖지만 구체적인 운영 방향은 고민을 계속하는 중이다. 김누리 씨는 실제 문을 열고 사람들이 찾아올 때 토닥의 새로운 정체성이 정해질 수 있다고 전한다.
정월대보름 지신밟기를 하러 지리산문화공간토닥에 온 마을 사람들ㅣ사진 지리산이음
카페 토닥을 운영하던 사람들은 선한 의지를 더 넓게 실천하기 위해 2016년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을 만들었다. 산내면은 90년대부터 일찍이 귀촌마을로 인기가 높았다. 그때의 귀촌 1세대들이 나이를 먹고, 자녀들은 모두 이곳을 떠나며 어느 순간 마을 자체가 나이 들어간다는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단절된 이웃 사이에 연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지금까지 지리산이음을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었다.
“지리산이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가치는 농촌에서도 재밌게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최대한 많이 전달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 마을 안에서 잘 살자’는 생각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시작했던 일. 지리산이음이 그리는 원은 점점 크기를 키워가며 전국을 대상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지리산포럼을 통해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자그마한 마을에 모여든다. 그들이 이 마을과 연결되며 계속해서 다시 찾아오고 풍성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 특별한 행사를 통해서만이 아닌, 농촌에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끊임없이 세상에 보여주며 농촌이 시민사회의 중심지로서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