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랑고랑의 박안나 할머니ㅣ사진 이랑고랑
문화로 지역 읽기, 네 번째 주인공은 군산과 김제다. 전라북도의 북서쪽에 함께 위치한 두 도시는 아름다운 만경강이 가로지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새만금을 비롯한 바다를 공유한다. 지리적으로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군산은 개항의 도시로서 항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이 발전했다. 외지인의 왕래 또한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한편 김제는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풍요로운 농경문화를 자랑한다. 활기찬 기운이 감도는 항구도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잔잔한 분위기를 띤다. 문화와 예술 또한 바다와 평야, 각기 다른 두 자연의 성격을 닮았다.
군산의 문화예술은 파도가 치듯 역동적이고, 시끌벅적하다. 여성, 장애인, 청소년 등 그동안 문화예술계가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을 주인공으로 이끈다. 김제의 문화예술은 노랗게 익어가는 벼가 흔들리듯 잔잔함 속 울림이 있다. 외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찾아와 드넓은 평야에 뛰어들었고, 농촌의 주민들 사이에 녹아들고 있다.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두 도시의 문화예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본다.
군산
페미니즘 문화기획 우만컴퍼니
미술공감 채움
청소년자치연구소 달그락 마을방송
군산은 개항의 도시다. 정치, 경제, 종교, 예술 할 것 없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일찍이 문화예술의 길을 열었다. 도심 한편에 파도치는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 곳곳에 묻어있는 근대역사와 문화의 흔적. 청년들의 힘으로 ‘힙한’ 변화를 맞이한 동네까지. 군산은 그 어떤 지역보다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2014년, 군산시 도시재생사업의 시작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생기를 잃은 월명동과 영화동 원도심 일대에 훈훈한 활기가 불기 시작하고, 관광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개성 있는 동네책방이 들어서고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자리 잡고, 기획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형성되어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주거지가 되기도 했던 신흥동 말랭이마을. 오랜 세월을 지나며 점차 발길이 끊긴 이 마을에는 예술가들이 찾아왔다. 회색 담장에 알록달록한 벽화가 채워지고 주민과 작가는 함께 예술을 나누며 골목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마을 하나의 변화는 지역문화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마을의 입주작가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지역작가 사이의 연대가 생겨나고, 평생 문화를 경험하기 어려웠던 주민들의 일상이 예술과 닿았다.
30년 가까운 세월, 지역민과 예술을 연결하기 위한 시도를 앞서 실천한 곳도 있다. 군산의 대표 연극단체인 ‘극단 사람세상’이다. 1997년 창단 이후 꾸준히 지역 관객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연극을 목표로 창작극을 올리고 있다. 이외에도 군산에는 다양한 모습의 활동가들이 살고 있다. 군산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들을 춤으로 재조명하는 무용가 최재희, 지역의 정체성을 알리는 웹툰을 그리고 책을 펴내는 독립만화 전문출판사 ‘삐약삐약북스’, 언론이 다루지 않는 우리 동네의 이야기를 알리는 ‘달그락 마을방송’, 여성을 주제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벌이는 ‘우만컴퍼니’, 문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전시나 공연, 교육활동을 통해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미술공감 채움’, ‘협동조합 아토’ 등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군산 골목마다 문화를 채워 넣고 있다.
올해 군산에는 반가운 소식들도 들려온다. 10년 넘게 방치되었던 군산시민문화회관이 복합문화공간으로 새 단장하여 시민들 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또, 난항을 겪던 군산문화재단이 본격적으로 출범하며 지역 문화예술의 성장이 기대되는 때이기도 하다. 이런 커다란 움직임 뒤편에서 여전히 저마다의 방식으로 군산을 조금 더 나은, 멋진 동네로 바꿔나가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김나은 대표
92년생 청년 김나은. 그는 2018년 군산에 왔다. 고향도 아니었고 연고도 전혀 없는 곳이었지만 매일 아름답게 지는 노을을 보고 도시의 속도를 느끼며 ‘여기서 잘 살아갈 수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안에는 늘 갈증이 존재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없으면 내가 만들자는 생각에 페미니즘 영화독서모임 ‘보다’를 만들었다. 이 작은 움직임이 지금의 우만컴퍼니를 세우는 불씨가 되었다.
“2019년 독서모임을 통해 많은 여성들과 만나면서 군산에도 나와 같은 갈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분들과 여러 활동을 하다가 영화 ‘이태원(감독 강유가람)’을 함께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있는 플랫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배급사를 통해 직접 영화를 틀고, 감독님을 초대해 GV도 진행했죠. 이왕 행사를 열거면 레퍼런스를 쌓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사업자를 내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만컴퍼니가 탄생하게 됐죠.”
‘우만’은 ‘우리가 만났을 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운명은 이름 따라간다는 말처럼 우만컴퍼니는 매번 새로운 만남을 통해 활동을 이어간다. 소속된 팀원은 김나은 대표 한 명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젝트에 따라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며 팀원을 꾸린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활동의 기반은 전부 사람의 힘이었다고 전한다.
영화 <이태원> 상영회 및 감독과의 대화
『우만플러그 군산』 2021
굳이, 군산과 여성인 이유
우만컴퍼니의 정체성은 지역과 여성을 향해있다. 김 대표는 청년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삶을 늘 고민해왔다. 누군가 ‘지역’에 관심을 둔다면, 자신은 ‘여성’의 시각으로 지역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2021년 발간한 『우만플러그, 군산』이 그 결실 중 하나이다.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인터뷰,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담은 에세이 등 6명의 친구들과 함께 완성한 책이다. 그 중 가장 마음이 가는 페이지는 ‘군산 역사, 여성으로 다시 읽기’ 부분이다. 그는 군산의 많은 역사 안에서 사라지고 배제된 여성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군산의 역사하면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쌀 수탈이나 미군기지 등을 떠올리지만 일제강점기 유곽부터 아메리카 타운, 대명동과 개복동 성매매 업소 화재참사까지. 역사와 동반되는 여성의 성착취가 있었다. 그는 이 현장들을 돌아보며 군산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둘 찾아갔다.
다음 해 주목한 것은 여성과 집의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진 그는 50년이 넘는 세월 한 집에서 살아온 고령의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의 사는 이야기, 반평생을 한집에 살며 집에 갖게 된 추억들을 담아 손바닥만 한 작은 책 『00의 집, 그 집』을 펴냈다.
“과거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포기하고 일찍 결혼해서 본인보다는 자식과 남편을 돌보는 게 우선시 되는 사회였잖아요. 제가 만난 한분은 나이 들어서도 남편의 병간호로 하루를 보내고 계셨어요. 온전한 나의 삶을 살아내기가 힘든 세대죠. 그렇지만 이런 모습만을 강조한 인터뷰집은 아니거든요. 그 안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했던 이야기들을 담았어요.”
정월대보름 『00의 집, 그 집』 2022ㅣ사진 우만컴퍼니
살아있는 지역 따라 움직이는 삶
김나은 대표가 말하는 군산의 매력은 아직도 읽힐 문장이 많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도시지만, 이곳 사람들은 외지인에 대한 경계를 두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군산에 와 이런저런 일을 벌이며 살고 있지만 이방인이라는 시선 없이 스며들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만드는 새로운 풍경과 같은 자리를 지키는 근대역사의 풍경, 요즘 친구들의 일상과 푸근한 할머니들의 일상, 오래된 집과 붐비는 관광지가 공존하는 도시. 군산에는 기록될 만한 다양한 문장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여성을 주제로 이 지역을 읽고자 했을 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는 것. 제가 느끼는 군산의 매력은 그래요. <우만플러그, 군산>을 같이 만들었던 한 언니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데요. -‘지역’이라는 게 사람이 아닌데 그에겐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현재를 생동하며 살고 있는 것까지. 어쩌면 생명체인 나보다 살아있는 존재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 움직이는 것 안에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움직이며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이 말이 너무 와 닿았고, 실제로 지역에서 활동하며 이 말의 의미를 체감하고 있어요.”
우만컴퍼니 사무실ㅣ사진 우만컴퍼니
그의 꿈은 우만컴퍼니가 20주년을 맞을 때까지 재밌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니 20년쯤은 거뜬할 것 같지만 열정만으로는 어려운 현실이다. 지속력을 갖추기 위해 올해는 수익이 나는 일들도 해나가려한다.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진짜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계획도 벌써 꽉 차있다. 최근에는 월명동을 기반으로 하는 여성활동가들과 모여 월명동글사무소를 결성하고 ‘소다공장’이라는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매주 한편의 글을 메일로 배달해 소소한 행복을 전한다. 이후에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일들이 많다. 소통협력센터 군산, 프로파간다(대표 김광철)와 함께 '아틀라스 군산'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다. 군산을 새로운 이미지로 시각화해 아카이빙하며 3권의 책 발간과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그는 또 지역에 즐거운 일을 벌이기 위해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고다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