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문화로 지역 읽기 | 군산   2024.4월호

사각지대 안과 밖,예술로 잇는 치유의 여정

: 미술공감 채움


반짝반짝 빛나는 우리는 예술가 2021ㅣ사진 미술공감 채움



매년 가을이면 군산에는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지역 예술가는 물론 장애인과 마을 어르신들이 그린 작품이 미술관을 채운다. 지난해까지 9회 동안 이어온 전시 ‘사각지대 블루스’다. 제목처럼 사회의 사각지대로 비켜난 소수자들이 문화예술의 주체가 되고, 어엿한 작가로 성장해 전시를 연다. 잘 섞일 것 같지 않은 그들과 문화예술 사이에 어떻게 다리가 놓아질 수 있었을까? 그 이면에는 긴 시간 소수자의 삶과 예술을 연결하기 위해 튼튼한 다리를 지어온 ‘미술공감 채움’이 있다. 


미술공감 채움은 법인이나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순수 문화예술단체다. 소수자들이 예술 활동을 통해 치유 받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2004년, 채움의 대표이자 설치미술가인 고보연 작가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예술가들이 뭉쳐 소소한 활동을 벌여오다 2012년 공식적인 단체로 출발했다. 현재 활동을 함께하는 작가는 10명 남짓. 미술뿐 아니라 글 쓰는 작가 등 분야는 다양하다. 이들은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어느 날 모여서 선한 실천을 함께한다.


왼쪽부터 김준정, 고보연, 문귀화 작가



소수자를 바라보는 ‘나’를 바꾸는 일 

고보연 대표의 작업실에서 오랜만에 채움 멤버 몇몇이 모였다. 문귀화(서양화), 김준정(문학), 남민이(조각, 회화) 씨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챙겨온 간식들을 내놓기 바쁘다. 정성껏 내린 드립커피에 따끈한 빵, 고구마에 오렌지까지. 후한 대접에 마음이 벌써 배부르다. 이들에게 무언가 나누는 일은 일상 같아 보인다. 소수자와 문화를 잇는 일 역시 자신의 예술을 나누고픈 마음에서 자연스레 비롯되었을 것이다. 


원도심에 방치된 사무실을 갤러리로 단장해 ‘공간 따숨’의 문을 열고, 지역의 소수자들을 위한 자조모임을 갖고, 발달·정신장애인들의 예술활동을 돕고,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촉각북을 만들고, 평생 일만 하며 살아온 어르신들의 버킷리스트를 이루어주는 등 채움이 해온 활동은 수없이 많고 다양하다. 그냥 예술하며 먹고 살기도 힘든 시대에 이렇게나 다양한 일들을 자처하며 소수자의 삶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출발은 ‘공감’에 있었다. 20년 전, 고 대표는 우연한 기회로 장애인복지관에 미술수업 봉사를 갔다. 장애인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을뿐더러 그들 옆에 가까이 있는 것조차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몸과 마음 역시 많이 아팠던 시기, ‘나도 힘든데 왜 내가 그들을 도와야하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픈 몸과 마음을 지닌 자신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삶을 공감하게 되었다. 소수자를 치유하는 과정은 곧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22 사각지대 블루스 전시 준비ㅣ사진 미술공감 채움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문귀화 작가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다. 그리고 싶은 열망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작업을 하기 힘든 상황이 오며 긴 시간 미술을 포기해야했다. 그는 채움을 통해 소수자 문화예술 활동을 시작하며 그림 그리는 삶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미술 봉사와 교육에 참여하면서 ‘예술가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 삶에 깊이 들어가서 진지하게 탐구하고.. 조력자의 역할을 하면서 저도 성장한 거죠. 이런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미술 자체도 포기했을 것 같아요.”


이곳에서 유일하게 글 쓰는 작가로 통하는 김준정 씨는 발달장애인 형규와의 일화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수업에서 만난 형규는 활동을 거부하며 구석에서 홀로 음악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가족 중 누구라도 챙겨주면 좋을 텐데’ 하는 측은함도 들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깨달았다. 나 자신이 저들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갖는 것 아닌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든 것이다.


“저 친구들에게 저는 그냥 2주에 한번 만나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인데, 내가 왜 저들을 안다고 판단하고 불쌍하게 바라봤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에게는 지금 그대로가 행복한 삶일 수 있고, 본인이 원하는 삶인지 아닌지 저는 알 수 없잖아요. 사실 이런 시선이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하거든요. 그들을 바꾸려하지 말고, 나를 바꾸는 일이 먼저라는 걸 배웠어요.” 



2021 장애인미술대회ㅣ사진 미술공감 채움



함께 일으키는 선한 바람  

이들이 소수자와 함께 계속해서 삶의 일부를 나누는 이유는 그들을 바꾸려는 것이 아닌, 결국 나의 시선을 바꿔나가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이들 한명 한명이 작가로서 성장하는 일이다. 교육을 끌어가는 작가와 따라가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덕분에 작가들은 개인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소수자를 위해 벌이는 활동들이 결국은 좋은 작업의 바탕이 되어주기도 한다. 발달장애인이라는 수식어를 벗어나 어엿한 작가가 된 경우도 있다. 자신만의 따스한 색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남기 작가는 자폐성 발달장애 2급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역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채움의 활동은 누가 시킨 일도, 안정적인 수익이 나는 일도 아니다. 단체가 힘을 잃지 않고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롯이 순수한 마음으로 동참한 예술가와 주변인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선한 바람은 지역 안에서 계속해서 크기를 키우고 있다. 나의 이익보다 공익을 생각하는 일.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 전에 나 먼저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 ‘미술공감 채움’의 이야기를 통해 공공의 예술이 갖는 작지 않은 힘을 다시금 느낀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