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문화로 지역 읽기 | 군산ㆍ김제   2024.4월호

바다와 평야, 그 사이로 문화가 스민다


이랑고랑의 박안나 할머니ㅣ사진 이랑고랑



문화로 지역 읽기, 네 번째 주인공은 군산과 김제다. 전라북도의 북서쪽에 함께 위치한 두 도시는 아름다운 만경강이 가로지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새만금을 비롯한 바다를 공유한다. 지리적으로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군산은 개항의 도시로서 항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이 발전했다. 외지인의 왕래 또한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한편 김제는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풍요로운 농경문화를 자랑한다. 활기찬 기운이 감도는 항구도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잔잔한 분위기를 띤다. 문화와 예술 또한 바다와 평야, 각기 다른 두 자연의 성격을 닮았다. 


군산의 문화예술은 파도가 치듯 역동적이고, 시끌벅적하다. 여성, 장애인, 청소년 등 그동안 문화예술계가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을 주인공으로 이끈다. 김제의 문화예술은 노랗게 익어가는 벼가 흔들리듯 잔잔함 속 울림이 있다. 외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찾아와 드넓은 평야에 뛰어들었고, 농촌의 주민들 사이에 녹아들고 있다.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두 도시의 문화예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본다. 






김제



예비사회적기업 이랑고랑

예술집단 얼간 & 예술공간 짚


김제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이다. 과거 곡창지대의 여유롭고 풍요로운 분위기를 바탕으로 미술, 문학, 무용 등이 고루 발전했다. 예술인들의 주요 활동지가 인근의 전주로 옮겨가며 김제 자체의 문화는 사라지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도 있다. 만경읍 대동리에서는 매년 가을 예술인들이 모여 '시골예술제 푼수들'을 열어 한바탕 축제를 벌인다. 우도농악은 김제 특유의 넉넉함을 바탕으로 흥겨움을 이어가며, 벽골제의 지평선축제는 명실상부한 지역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농경문화가 발달한 이곳에선 최근 문화예술을 수확한다. 문화예술교육단체인 '이랑고랑'이 지역 어르신들의 마음에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예술의 씨앗을 틔우고 있기 때문이다. 


곧 130주년을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도 김제에서 피어났다. 특히 금산면 원평리는 동학농민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농민군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읍면 단위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곳이 최근 문화예술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집강소가 있던 자리에는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서 주민들의 생활문화예술 행사가 꾸준히 열리고 있다. 또한 2008년 만들어진 무예공연단체 '지무단'은 원평을 중심으로 잊혀져가는 무예를 예술로 표현하며 전국을 누비고 있다. 이곳에 3년 전, 작은 공연장이 생겼다. 김제 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예술집단 얼간'이 '예술공간 짚'을 통해 지역 유일의 민간 공연장으로서 공연 문화를 피우고 있다. 


한편 교동의 구도심은 인구가 줄어들며 슬럼화되는 듯하였으나, 최근 김제 동헌과 향교 등 역사 유산을 중심으로 문화예술 행사가 펼쳐지며 활기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전국 내아 건물 중 최초로 보물로 지정된 김제 동헌의 내아에서는 매년 문화재야행이 열리며, 올해는 동화 콩쥐팥쥐를 바탕으로 하는 김제브랜드공연의 무대가 되어 시민들을 만날 예정이다. 문화예술회관은 2009년부터 문화예술 인프라가 부족한 김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노후화된 시설로 인해 문제가 있었다. 대신 유적들과 전통시장 등 구도심의 문화를 한 번에 잇는 문화예술 커뮤니티센터의 건립이 최근 박차를 가하며 김제 문화예술이 새롭게 움트고 있다.



기획 | 문화로 지역 읽기 | 김제   2024.4월호

주름진 손과 함께 그려내는 예술

: 예비사회적기업 이랑고랑


마을회관에서 그림 그리는 박안나 할머니ㅣ사진 이랑고랑



대부분의 시골 마을 할머니에게 문화예술은 낯설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없었다. 한평생을 가족 뒷바라지에만 힘썼다.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도시로 떠나 혼자 남은 할머니들끼리 마을회관에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흔한 시골 풍경이다.


김제시 광활면 용평마을도 그런 마을 중 하나다. 하지만 2020년, 용평마을 할머니들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평생 붓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어르신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연기를 배우고 연극 배우가 되었다. 예비 사회적기업 '이랑고랑'(대표 황유진) 덕분이다. 이랑고랑은 밭에 있는 이랑과 고랑을 가슴 속에 만들어 내재된 예술의 씨앗을 틔워준다는 의미다. 2016년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4년 전 용평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며 빛을 발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예술이 있다

조소를 전공한 황유진 대표는 전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이 많아 예술계 동료들과 함께 이랑고랑을 만들었지만 코로나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용평마을 벽화 그리기 의뢰를 받았다. 그는 예술가 대신 주민들이 직접 벽화를 채울 수 있도록 주민을 대상으로 한 미술 수업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무슨 그림이냐' 하던 어르신들도 손주뻘의 선생님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특별한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어르신들이 붓을 친숙하게 느끼는 것부터, 마을의 꽃, 식물, 곤충, 동물 등 소소한 풍경을 하나씩 그려보며 출발했다. 마을회관은 어느새 물감과 그림으로 채워졌다. 


3년 뒤 그림들을 모아 죽산면의 '마을 오픈 갤러리'에서 전시 <어르신들의 나라>를 열었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 할머니가 아닌 '작가'로서 이름 석 자가 걸린 전시는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황 대표는 어르신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 걸린 갤러리를 천천히 돌아보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울컥하는 보람을 느끼며 용평마을과 계속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림자연극 <광활한 사랑>ㅣ사진 이랑고랑



“내 사랑은 광활해서, 우리 남편, 

아부지, 어무니, 아들 딸, 손녀, 손자 

 다 담고도 남지요.”


“광활하다가 뭐예요?”


“끝도 없이 넘치도록 이어지는 사랑이지. 

 광활면에 사는 할미들은 광활한 사랑을 했어.”



평화로운 미술 수업이 이어지던 용평마을에도 작년 위기가 찾아왔다. 일명 반대파(?) 할머니들로 인해 균열이 일어난 것. 할머니들 사이에서의 그림 실력 차이가 문제였다. 미술에 관심 없는 할머니들은 이랑고랑이 마을에 올 때마다 묘한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에 이랑고랑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고민하여 '연극'에 도전했다.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을 인터뷰하여 '종수의 연애', '순애의 신혼', '화순의 결혼', '정순의 남편과 딸 봄이' 등의 에피소드를 구성하고 대본을 썼다. 할머니들은 배우로 변신했고, 극은 영상으로 촬영되어 전주 기린미술관에서 상영됐다. 결과는 대성공. 마을은 다시 평화를 찾았다. 반대파 두목(?) 할머니는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즐거운 여름을을 보냈다는 소감을 전했다.



일대일 수업 중인 이랑고랑 황유진 대표(위), 이랑고랑의 아트상품(아래)



1938년생 인턴을 채용하다 

용평마을에는 유독 뛰어난 그림 실력을 보이는 할머니들이 있다. 이랑고랑은 이들의 그림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 바로 아트 상품이다. 스마트톡, 포장지, 달력 등을 만들어 온라인으로 판매하고 각종 일러스트 페어에 출품하여 완판되기도 했다. 가장 인기가 좋았던 박안나 할머니는 이랑고랑의 인턴으로 정식 채용되었다. 근로계약서까지 완벽하게 작성한 1938년생 '인턴 디자이너'다. 4대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하자 '보험 가입시키려고 지금까지 그랬냐'는 웃픈 에피소드도 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한 이랑고랑의 동료다. 올해는 한 분을 추가로 채용하고, 김제 원도심에 쇼룸을 만드는 등 더 다양한 계획이 예정되어 있다. 


이랑고랑에게 있어 올해 무엇보다 특별한 것은 교육 기업 '구몬'과의 협업이다. 곧 발행될 구몬 시니어 매거진의 표지가 박안나 할머니의 그림으로 꾸며진다. 이외에도 여러 기업과의 협업을 준비 중이다. 단체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수익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이렇다 할 수익이 없기에 단체의 지속 가능성에 고민이 많던 황 대표였다. 기업과의 협업은 이를 위해 찾은 방법이다. 이랑고랑은 마을에 사다드린 수많은 물감과 종이가 다 쓰일 때까지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이어갈 것이다. 






박안나 할머니


계란 하나를 먹어도 꽃을 만들게 됐다고

"이제 하도 그려서 질렸어." 박안나(1938) 할머니는 최근 매너리즘(!)에 빠졌다. 어째 다 비슷비슷한 그림만 그리게 된다는 것. 황유진 대표는 이런 할머니의 고민이 오히려 반갑다. 예술이 힘들다는 것은 곧 진정한 작가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슬럼프에 빠진 할머니를 위해 수십 개의 전시 팜플렛을 가져와 다양한 작가들의 화풍을 설명한다. "점심에도 계란을 먹는데, 그걸 가지고 괜히 꽃처럼 만들어보고 그랬다고…" 아무래도 박안나 할머니의 슬럼프는 곧 끝날듯하다. 오늘도 할머니의 일상은 예술로 가득하다.





라순애 할머니


내 그림에 뭐 볼 게 있다고 그려

라순애(1940) 할머니는 용평마을의 소문난 츤데레(?)다. 취재를 위해 댁에 방문한다고 하니 이제는 그림 안 그린다고, 내 그림에 뭐 볼 게 있냐고 하시며 난색을 보이신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간 방 한편에는 100장이 넘는 그림이 쌓여있다. 적적할 때면 괜스레 종이를 넘기며 그림을 보신단다. 미술용 종이 외에도 한지, 달력, 시정 소식지 등 공백이 있는 종이라면 일단 그림을 그렸다. 임신했을 적 그렇게 먹고 싶었지만, 시부모님 눈치 때문에 먹지 못했던 복숭아. 남편이 몰래 사다 장롱 속에 숨겨놨더란다. 할머니는 그 기억을 되살리며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그려두었다. 




라순애 할머니


노랑색 파랑색 섞으면 '배추색'이지

어느날 아침, 황유진 대표의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원하는 대로 그림이 안 그려진다는 박점순(1935) 할머니의 고민. 아크릴물감만 쓰다가 수채화를 도전하려니 답답하다. 소식을 듣고 댁으로 달려간 황 대표는 수채화의 물을 조절하는 방법을 할머니의 눈높이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물통은 부엌 한 구석에 있던 뚝배기다.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으면 어떤 색이 나올 것 같냐는 질문에, 단번에 배추색! 이라고 대답하는 박점순 할머니. '허연 거 눈에 뵈이지도 않고 어따 쓰나'했지만, 하얀색 크레파스는 어두운 바위에 명암을 주는 좋은 도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