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문화로 지역 읽기 | 고창ㆍ부안ㆍ정읍   2024.5월호

오랜 정체성을 지키며 새롭게 나아가는 여정


고창 거리극축제 <노상놀이야>ㅣ사진 고풍



새해의 시작과 함께 출발한 기획 ‘문화로 지역 읽기’가 전북 지도를 한 바퀴를 돌아 어느새 마지막 지역을 향한다. 그동안 13개 시군의 낯선 동네들을 두발로 찾아다니며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지역을 가꾸고 사랑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로 인해 작은 지역들은 다시 힘을 내고 있다. 


지난 기획을 통해 만난 청년들 대부분은 지역살이가 결코 쉽지 않다고 한탄했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비슷했다. ‘지역 안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말 그럴까? 처음에는 의심이 들었지만 이제는 이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의 문화예술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지만 다르게 바라보면 그만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문화로 지역 읽기’ 마지막 지역은 고창, 부안, 정읍이다. 세 지역 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펼치며 도시의 빈틈을 채워가고 있을까. 지역의 오랜 정체성을 지키거나 그전에 없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해 내는 사람들. 같은 듯 다른 세 지역의 이야기를 문화로 읽어본다.



문화로 지역 읽기ㅣ 고창


1 인문학당 책이 있는 풍경   
2 아트컴퍼니 고풍


봄이 무르익는 이맘때면 고창의 청보리도 초록으로 무르익는다. 유채꽃과 메밀, 해바라기 등 계절에 따라 색을 바꾸는 풍경은 많은 여행객을 사로잡는다. 고창읍성과 고인돌, 판소리 등 가치 있는 문화유산들은 도시 곳곳에 이야기를 남기고, 고창은 대한민국 최초로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역사와 문화, 생태, 관광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지역을 이루는 다양한 키워드들은 곧 다양한 문화를 생산한다. 고창에서 활동했던 조선후기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 그의 뜻을 세계에 알리고 고창의 전통음악을 되살리고자 젊은 국악인들은 뜻을 모아 ‘국악예술단 고창’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이 고장만의 아름다운 농촌풍경을 살려 탄생한 영화제도 있다. 지난해까지 6회째 이어온 ‘고창농촌영화제’다. 고창의 유일한 영화관인 동리시네마를 활용해 매년 가을, 영화를 통해 농촌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청년들의 활동도 최근 몇 년 사이 활발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고창 청년벤처스’가 대표적이다. 고창에 이런저런 이유로 정착하게 된 청년 40여 명이 모여 2018년부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역 농산물과 제품을 모아 선보이는 플리마켓부터 청년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시골생활을 현실적으로 담아내는 로컬잡지 ‘시고르자브지’를 발행하는 등 재미있는 일들을 벌인다. 


고창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고창농악. ‘고창농악보존회’를 중심으로 한 산하의 여러 단체가 우리 농악의 가치를 보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아트컴퍼니 고풍’은 농악을 현 시대에 맞는 예술로 재해석하며 주목 받고 있다. 농악이 함께하는 공동체 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실천하는 특별한 문화공간도 있다. 일상에 인문학을 더해주는 공간 ‘책이 있는 풍경’이다. 이들이 지역에 전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고다인 기자




문화로 지역 읽기ㅣ 부안


1 청년 로컬 기업 시고르청춘
2 지역 잡지 부안이야기


'생거(生居)부안'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영조가 어사 박문수를 불러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묻자, “사람 살기에는 부안이 최고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다. '살아서는 부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과 들, 바다가 모두 있어 예로부터 먹거리가 풍부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다. 


풍요롭고 넉넉한 분위기는 문화·예술에서도 드러난다. 부안 출신의 신석정 시인은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목가시인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했다. 부안농악은 호남 우도 농악 중에서도 멋스럽고 섬세하다는 평을 받는다. 故나금추 명인을 중심으로 맥이 이어지다 현재는 부안농악보존회와 '전통예술원 타무'가 그 뜻을 잇는다. 2009년 창간한 잡지 '부안이야기'는 이러한 다채로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따뜻하게 전한다.


부안은 고려청자의 본향으로 좋은 흙과 목재가 풍부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자 생산지였다. 2011년 부안 청자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지금도 부안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공예가들이 살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공예문화 거점도시'로 선정되어 5월 17일부터 26일까지 부안 공예주간을 운영한다.


최근에는 청년을 중심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변산에서는 청년 농부들이 매년 '별밤마당음악회'를 연다. 청년들의 건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부안청년건강모임'과 청년 예술 커뮤니티인 '소금단'까지 합세하여 농촌 청년 문화를 새롭게 이끈다. 자신들을 시골의 보물 사냥꾼이라 부르는 '시고르청춘'은 부안 읍내에 시골의 매력을 알리는 보물창고를 만들었다. 전 세대가 함께 지역의 문화를 일구어 나가는 도시, 그곳이 부안이다.


류나윤 기자




문화로 지역 읽기ㅣ 정읍


1 독립서점 작은새책방  
2 문화예술단체 둘레


‘일상이 문화예술’, 정읍이 올해 실천하고자 내건 슬로건이다. 정읍시는 올해부터 시민체감형 문화예술 정책을 강화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봄에는 벚꽃축제, 여름에는 물빛축제, 가을의 구절초축제 등 계절을 대표하는 축제를 열고, 여러 기획전시와 공연을 통해 지역 안에서도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정읍하면 가을철 단풍 명소로 유명한 내장산이나 특산물로 꼽히는 쌍화차, 한우 등이 먼저 떠오른다. 풍부한 관광자원을 자랑하지만 문화예술을 대표할만한 콘텐츠는 여전히 물음표다. 


그러나 굵직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지닌 정읍은 그만큼 활용할만한 문화자원도 많다. 도내에서는 가장 먼저 시립미술관을 개관해 운영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정읍시립미술관·박물관을 통해 시민들이 언제든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제대로 된 공연시설마저 부족했던 작은 지역들과 비교하면 연지아트홀이나 정읍사예술회관 등 공연장도 나름 잘 갖추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문화공간들의 활용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 좋은 전시나 공연 등 각 공간이 담아내는 콘텐츠의 질적인 부분에는 여전히 고민이 필요한 현실이다. 


해답은 결국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움직일 때 도시의 문화와 예술은 비로소 힘을 갖는다. 정읍에는 어떤 사람들이 자그마한 변화들을 이끌고 있을까. 오랜 시간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단체부터, 조용하던 길목에 문을 활짝 열어두고 반기는 특별한 책방까지. 이들의 이야기가 모여 ‘일상이 문화예술’인 정읍에 다가가고 있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