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문화로 지역 읽기 | 고창   2024.5월호

한 사람의 서재가 거대한 문학관이 되기까지

: 인문학당 ‘책이 있는 풍경’


나태주 시인(왼쪽)과 북토크. 오른쪽 박영진 촌장



고창 신림면 논밭 사이로 구불구불 난 시골길을 가다보면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된다. 풀잎 가운데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듯, ‘책이 있는 풍경’이 반짝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진한 책 향기를 풍기는 이곳은 문학관이자 마을의 사랑방으로 통한다. 빛바랜 고전부터 최신 베스트셀러까지, 천장 가득 채워진 4만 여권 책들은 주인인 박영진 씨가 평생 모아온 것들이다. 한 사람의 서재가 어떻게 마을의 문학관으로 품을 키울 수 있었을까. 


책풍(‘책이 있는 풍경’을 줄여 부르는 말)은 그가 세상으로부터 위로받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20여 년 전, 당시 사업이 망하고 힘든 시기를 겪던 박영진 씨는 가지고 있던 수 만권의 책을 짊어지고 전주에 북카페 ‘책이 있는 풍경’을 열었다. 이후 수많은 책들과 운명을 함께하며 7번이나 이사를 다닌 그는 2012년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왔다. 조그마한 집을 지어 짊어진 책들을 내려놓고, 위로의 시간을 보내다보니 하나둘 작가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책풍은 그렇게 자연스레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힘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촌장님이라 부른다. 불쑥 찾아와도 ‘촌장님’하고 부르면 고소한 커피 한잔을 내주며 세상 친근하게 반겨준다.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해준 공간이기에 그는 사회에 베푸는 마음으로 이곳을 10년간 무료로 운영해왔다. 그러나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운영을 지속하기 어려워져 2년 전부터 회원제 중심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우려가 되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책풍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정지아 소설가 초청강연회 '삶이 소설이 되기까지'


“처음에는 회원제를 한다는 말을 듣고 저희 어머니가 ‘사람들한테 2만원씩 삥 뜯고 산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잘했다고 하세요. 회원들이 전보다 훨씬 더 이 공간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저는 더 좋은 프로그램들을 만들고, 혜택을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책풍에서는 매주 인문학 강연을 열고 작가들과 만나 문학을 탐구하며 이름 그대로 책이 있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월요일이면 약속처럼 인문학 강좌를 여는 그는 자신이 직접 강연자로 나서 강의를 펼친다. 매번 한 권의 책이나 인물을 정해 공부하며 삶에 보탬이 될만한 이야기들을 준비한다. 그 과정이 쉽진 않지만 사람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여정은 즐겁다. 지난해 가을에는 그동안 해온 수많은 강의를 책으로 묶어내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남기기도 했다. <사랑의 인문학 번지점프하다>를 펴내며 비교적 익숙하고 쉽게 읽힐 수 있는 주제들을 모았다. 알고 보면 그는 촌장이기 이전에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창비40주년 특별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문학평론가이자 인문학자다. 어렵게 느껴지는 인문학을 조금이나마 일상 가까이 들여놓는 것. 박영진 촌장이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다.



박영진 촌장




‘책에 무관심한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니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며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니 삶이 깊어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사랑하도록, 풍요롭게 읽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책의 첫 장에 쓰인 이 인사말이 곧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압축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는 앞으로도 인문학과 삶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재미난 일들을 벌일 예정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고민도 따른다. 현재 책풍의 회원 대부분은 외부에서 이어진 인연들이 많다. 지역 내 회원들도 조금씩 늘고 있긴 하지만 고창 사람들이 먼저 관심을 갖고 함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과제다. 

“제가 고향에 돌아와서 깜짝 놀랐던 게 고창에는 자생적인 문화단체가 꽤 많다는 거예요.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각자가 모여서 의미 있는 활동들을 하고 있거든요. 아쉬운 점은 그 활동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점인데요. 올해부터는 고창군이나 문화관광재단을 중심으로 뭔가 엮일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아요. 함께 즐기고 공감하는 것이 문화잖아요. 지역의 문화예술 단체와 주민들이 함께하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지역 청년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방법들도 찾아보려고 해요.”


박영진 촌장이 생각하는 책풍은 삶의 쉼표라고 한다. 100명 중 한 명이라도 오늘 위로를 받고 돌아간다면 그것으로 의미는 충분하다. 꼭 책을 꺼내 읽지 않더라도 이 공간에 안겨 책 자체가 주는 위안이 마음에 스며들길. 마지막까지 따스한 당부를 전한다. 고창 시골마을의 복덩이 같은 존재로, 책과 사람이 함께하는 풍경이 계속되길 응원한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