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역사와 전주 부채의 멋   2024.7월호

이천 년 전부터 불어온 바람


차면선으로 사용된 부채ㅣ단원 풍속도첩 '나들이'



인류의 기원과 함께하는 부채의 역사 

오래된 고전영화 속에서 커다란 나뭇잎을 활용해 왕을 향해 부채질 하는 장면을 종종 보곤 했다. ‘부채’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도 나뭇잎이 곧 부채의 역할을 했듯, 부채는 인류의 기원과 그 역사를 함께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유적인 다호리에서 발견된 부채 자루가 최고의 부채 관련 유물로 여겨지니, 우리나라에서 부채가 사용된 시기 역시 최소 2천여 년 전이라 짐작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부채도 진화하며 부채의 쓰임새는 단순히 더위를 날리는 역할에 멈추지 않았다.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는 신분을 상징하는 전유물이 되고, 혼례식에서는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술의 일종으로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기도 하며, 무당이 굿을 할 때, 소리꾼이 무대에 오를 때도 부채는 함께한다. 어디서든 요긴한 도구로 통한 덕에 여덟 가지 덕을 지닌 팔덕선(八德扇)이라 불리는 부채가 등장하기도 했다.   


─팔덕선(八德扇)

하나,  비를 가려 젖지 않게 해주는 덕

둘,  파리나 모기를 쫓아주는 덕

셋,  땅바닥에 앉을 때 깔개가 되어주는 덕

넷,  여름날 땡볕을 가려주는 덕

다섯,  방향을 가리킬 때 지시봉의 구실을 하는 덕

여섯,  사람을 오라할 때 손짓을 대신하는 덕

일곱,  빚쟁이와 마주쳤을 때 얼굴을 가려주는 덕

여덟,  남녀가 내외할 때 서로 얼굴을 가려주는 덕 


이 여덟 가지 덕은 전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만큼 부채의 용도가 갈수록 넓고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채는 우리말로 손으로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부’ 자와 가늘게 오린 나무 등의 기다란 물건이라는 뜻인 ‘채’ 자가 더해진 말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 한자어로는 ‘선자(扇子)’라고 한다. 전통 부채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선자장이라 칭하며 2015년 국가무형유산 제128호로 선자장이 처음 지정되었다. 부채는 단순해 보이지만, 숙련된 장인의 손길을 수백 번 거쳐야만 완성된다. 곧은 대나무를 정교하게 깎아내고 균형에 맞춰 부챗살을 다듬어 한지를 바르는 것까지. 어느 하나 손길이 닿지 않는 과정이 없다. 



 

접선(엄재수 선자장의 합죽선)과 단선(방화선 선자장의 태극선)



단선과 접선, 그 안에 담긴 삶의 미학 

부채는 크게 단선과 접선으로 나뉜다. 단선은 부채살에 비단이나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형태의 부채로, 방구부채라 불리기도 한다. 형태와 재료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며 부챗살의 끝을 휘어 오동잎맥처럼 구부려 만든 오엽선, 색지를 배색하여 만든 까치선, 태극무늬가 장식 된 태극선, 선면에 옻칠을 한 칠선 등이 대표적이다. 단선은 부챗살이 손잡이 중심에서부터 둥글게 퍼져나가는 모습이 이른 아침 햇살이 천지의 만물을 일깨우는 형상을 지녔다.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고 바람을 일으키는 단선의 특성상 손잡이 부분이 튼튼해야 한다. 바람 하나를 일으키는 데에도 조화로움을 추구했던 선조들은 문양과 형태를 통해 부채의 멋을 추구했다. 부챗살을 구부려 단선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등 선면 속에 감춰진 부챗살로도 소소한 멋을 낼 줄 아는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접선은 우리말로 쥘부채라고도 하는 접을 수 있는 부채를 말한다. 원형으로 펼쳐지며 햇볕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하던 대륜선, 선면을 글씨나 그림으로 장식한 서화선, 선비들이 사용하는 접선을 뜻하는 한림선 등 접선은 부챗살의 수나 장식, 사용자의 신분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는다. 펼쳐서 바람의 숨결을 일으키고 접어서 바람의 숨결을 잠재우는 접선은 그 모양이 힘찬 나비의 날갯짓을 닮았다. 그래서 접선을 통해 부는 바람은 더욱 단단하고 묵직하다. 180도로 활짝 펼쳐지는 접선은 우리나라 부채만의 특징인데, 50개의 살을 만들기 위해 100번을 접어야 하므로 ‘백접선’이라고도 하였다. 


특히 대나무의 겉대를 두 겹으로 붙여 만든 합죽선은 인기가 가장 좋았다. 옛 선비들은 합죽선을 쥐어야 비로소 외출을 했을 정도로 대나무의 올곧음과 한지의 청량함을 담고 있는 합죽선은 조선시대 애용되던 부채였다. 반원형으로 펼쳐지는 합죽선은 가끔 도화지를 대신하기도 했다. 옛 사람들은 그 공간에 시와 그림으로 안부를 전하기도 하며 접선을 펼쳐 마음을 전했다가 접어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도 했다. 이것이 접선이 가진 펼침과 접힘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선자청이 그려진 <완산부지도 십곡병풍>ㅣ국립전주박물관



예로부터 부채하면 전주였다

전국에서도 전주 부채는 특히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담양, 남원 산내, 함양 등 인근에서 질 좋은 대나무가 많이 난 덕에 재료 수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며 부채 생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여기에 닥나무가 자라기 좋은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어 종이의 질이 우수했으니 여러모로 부채 만들기에 좋았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전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에 선자청을 두고 부채의 제작과 관리를 통솔했다. 전주 부채는 연례행사로 조정에 납품되었으며, 임금이 신하들에게 전주 부채를 하사하기도 했다. '완산부지도 십곡병풍' 안의 전라감영 지도를 보면 당시 선자청의 위치와 규모를 알 수 있는데, 16칸의 큰 규모로 되어 있었으며 위쪽으로 종이를 만드는 '지소'도 함께 자리했다. 지금의 완산경찰서 민원실 뒤편 사거리 모퉁이로 그 위치가 추정된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전라감영 자리에 구 전북도청사가 들어서고 선자청이 사라지자 부채를 만들던 장인들은 중앙동으로 터를 옮겼다. 이때 전주 부채를 이끈 것이 한경필(단선), 방춘근(단선), 문준하(합죽선) 선자장 등이다. 광복 이후 중앙동이 발전하자 이들은 다시 전주 외곽 지역인 가재미골(현 덕진구 인후동), 석소마을(현 아중리), 안골 등으로 이주하여 일종의 부채마을을 형성하였다.


형성된 공방촌 중 가재미골의 규모가 상당하여 1960년대까지 약 30호 정도가 부채를 생산하였다. 현존하는 선자장들의 고향도 대부분 이곳이다. 부채를 만드는 전 과정을 소화할 만큼 큰 집이 없었기에 중요한 일들은 선자장들의 집에서 이루어지고 나머지 잔업들은 각 집마다 분업하여 하였다. 방화선 선자장(故 방춘근 선자장의 장녀)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적 집에서 함께 부채를 만들던 인부가 160여 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1941년 『매일신보』에는 전주 부채의 한 해 생산량은 70여 만 자루에 달해 전국으로 팔려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전주 부채의 전성기는 선자청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이후 선풍기와 에어컨 등이 개발되고 공장에서 나온 값싼 부채들이 시장에 들어오자 전통 부채를 만드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부채 제작이 무형유산으로서 보존되어야 함이 제시되자 1993년 전라북도무형유산 제10호로 선자장이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故 방춘근, 故 이기동, 故 조충익, 故 엄주원, 故 박인권, 김동식, 방화선, 박계호, 엄재수 등이 보유자로 지정. 2015년에는 국가무형유산 제128호로 김동식(합죽선) 선자장이 최초 보유자가 되었다. 선자장 이외에도 접선의 두꺼운 대나무살에 인두로 무늬를 새기는 '낙죽'에는 이신입 낙죽장이 전라북도무형유산 제51호 전주 낙죽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현재 김동식(합죽선), 방화선(단선), 박계호(합죽선), 엄재수(합죽선) 등의 선자장들이 전주 부채의 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대부분의 선자장이 제자를 구할 수 없어 자식을 이수자로 하여 전통 부채 제작 기능을 전승하고 있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