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이 어둑해지는지도 모른 채 부채를 만들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둥근 보름달이 떠 있다. 구름 사이로 밝게 빛나던 보름달이 부채로 다시 태어났다. 보름달로 바람을 일으키는 낭만적인 생각. 방화선 선자장의 '온선'은 이렇게 탄생했다. 장인은 누구보다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특별한 부채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라북도무형유산 단선 보유자 방화선 선자장을 만나 그의 무한한 단선의 세계를 들어 보았다.
걸음마다 탄생하는 부채
방화선 선자장은 보름달을 닮은 온선 외에도 자신만의 세련된 감각으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창작 부채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그의 걸음이 닿는 자리, 돌리는 시선마다 부채가 새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단풍을 보며 '낙엽선'과 '은행선'을 만들었고, 딸과 함께 나들이를 갔던 덕진공원에서는 '연잎선', '연화선', '연자선'이 태어났다.
서쪽 바람이 날리는 모양을 담은 '하늬선'에 담긴 이야기는 더욱 특별하다. 전주부채문화관의 전시를 준비하던 중 우연히 전시 기간이 광복절과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광복절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아 기존 작업을 멈추고 광복을 주제로 한 새로운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태극선을 재해석하여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고, 손잡이는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며 조각했다. 덕분에 전시관 한 벽면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이게 단선의 매력이에요. 무궁무진한 것, 선면 위에 내 꿈과 생각들을 모두 담을 수 있잖아요. 접선은 아무래도 형태에 한계가 있지.
국화문양 곡두선(왼쪽), 바람의 함성
그는 최근 완판본문화관에서 열리는 판각 강좌 기초반에 등록했다. 부채의 나무 손잡이에 직접 판각을 하고 싶어서였다. 새로운 부채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분출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새롭게 태어나는 무형유산의 생명력은 어디까지 닿을까 궁금해진다.
우리 곁의 단선
여성 선자장으로는 유일한 그는 단선에 담긴 의미와 가치을 알리는데도 열정적이다. 사대부 양반들이 주로 사용했던 합죽선과 달리 단선은 서민들과 여성들의 부채였다. 전통 부채하면 합죽선이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부채의 원조는 단선이란다. 손잡이가 달린 둥근 모양의 부채인 단선은 접었다 펼 수 있는 '접선'보다 그 역사가 훨씬 오래됐다.
단선은 여자들의 생활필수품이었어요. 여름 되면 바람 일으키고, 햇볕도 가리고, 모기도 쫓고. 아기에게 살살 부쳐주기도 하고. 부엌에서 불씨도 살리고. 옛날 여자들은 머리에 많은 걸 이고 지고 돌아다녔잖아요. 그럴 때 똬리의 역할도 했고, 걸어가다 힘들면 깔고 앉는 방석이 되어주기도 했어요. 그래서 팔덕선(八德扇)이라고 했어요. 쓰임이 많아서.
대표적인 단선인 '태극선'은 전주의 오랜 특산품이다. 색색의 화려함과 섬세함, 견고함을 인정받아 왕에게 진상되었다. 파랑은 하늘, 빨강은 땅, 노란색은 사람. 음양의 조화를 뜻하는 태극 문양을 부채에 담은 태극선에는 우리 전통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다.
방화선 선자장
바람의 결을 잇는 사람들
"집이 풍족하고 먹고 살만한가요?" 때때로 부채를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가 제일 먼저 건네는 말이다. 부채를 만드는 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어도 선뜻 반길 수 없는 이유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부채동아리 '나린선'을 결성하고 제자 육성에 힘쓰고 있다. 딸(송서희 이수자)을 비롯한 12명의 제자가 모인 나린선은 순우리말로 '하늘에서 내린 부채'라는 뜻이다. 해마다 전시를 열고 관련 체험과 교육을 진행하며 단선의 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전주 부채를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하지만, 그는 항상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제자들이 있어 마음이 놓인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바람이 있다. 단오선을 선물하던 옛 풍습을 다시 한번 일으키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이 문화를 전주를 중심으로 되살리고 싶은 것이 그의 오랜 소망이다. 다가오는 여름, 에어컨과 선풍기로는 느낄 수 없는 여유롭고 느긋한 바람을 주변에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부채동아리 '나린선'
* 방화선 선자장은 전라북도무형유산 단선 보유자인 故 방춘군 선자장의 장녀이다. 아버지를 따라 부채를 만들기 시작하여 단선 부채의 맥을 잇고 있다. 현재는 딸인 송서희 씨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인 부채동아리 '나린선'을 중심으로 단선 전승에 힘쓰고 있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