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잇는 장인들   2024.7월호

전통과 현대, 조화로운 바람을 일으키다

: 엄재수 선자장




전주 한옥마을 남천교를 지나면 바로 보이는 부채박물관. 이곳에 들어서면 정갈하게 묶은 머리에 온화한 미소로 반기는 엄재수 명인을 만날 수 있다. 역사 속 빛바랜 합죽선은 물론이고 노랑, 보라, 초록 등 ‘요즘’ 스타일로 옻칠을 한 칠접선까지. 명인은 한평생 부채와 동고동락하며 지금의 공간을 완성했다. 전시장을 채운 다양한 부채들은 어떤 사연을 안고 있을까. 전라북도무형유산 선자장 엄재수 명인이 들려주는 부채 그 너머의 이야기를 담았다. 



합죽선, 새로운 이야기를 더하다 

한 해가 시작되면 명인이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그 해의 유행 색깔을 검색하는 일이다. 이를 반영해 작품에 어떤 색을 더할지 고민한다. ‘선자장’하면 흔히 떠올리는 장면과 조금 다른 장면이다. 그는 시대가 변한 만큼 합죽선 역시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합죽선 고유의 원형은 지키되 다양한 겉옷을 입히는 식이다. 매년 다른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며 이러한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올해의 주제는 ‘백색소음’이었다. 스스슥 탁, 대나무가 깎여 나가는 소리와 사악 사악, 옻칠을 칠하며 들리는 소리 등 작업을 하다보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이 백색소음에 주목했다. ‘백색’에서 힌트를 얻어 하얀 한지의 색을 그대로 살리고, 귀한 흰색 재료들을 모아 치장을 했다. 



‘천천히 부채질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느껴지는 평안함과 미미하게 올라오는 향기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채가 꼭 필요한 도구는 아니다. 그러나 마치 백색소음처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에게 정신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물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컬러소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색소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정신적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 '백색소음' 전시 소개 중



 

합죽 어피선



전통과 현대의 균형을 유지하며 

이러한 창작 활동은 결국 합죽선의 원형이 바탕이 되기에 가능하다. 엄재수 명인은 잃어버린 합죽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인물 중 하나다. 선자장의 길에 들어설 당시 그는 ‘조선시대 부채의 진짜 모습이 어땠을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과거 유물과 자료들을 찾아 연구하며 지금의 부채가 옛것에 비해 많이 변형된 형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명인의 노력으로 사라질 뻔한 합죽선의 원형은 현대에 맞게 다시 복원되고 재현되었다. 


무언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은 그 원형을 바로 알고 난 후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부채의 뿌리를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옛 논문들을 읽고 재료를 모으고 노력하다보니 사라진 기법들을 어느 정도 찾아낼 수 있었죠. 그때 연구하며 하나둘 유물을 모으다보니 그 수가 너무 많아졌어요. 귀한 유물들을 혼자만 보기 아까운 마음에 지금의 부채박물관도 열게 된 것이죠.


보존해야할 부채의 원형과 새로운 시도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며 그는 자신만의 매력적인 합죽선을 만들고 있다. 덕분에 그의 부채를 찾는 애호가들도 늘었다. 이들은 ‘햇살선자방’이라는 이름으로 동호회까지 결성해 엄재수 선생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한창 많을 때는 100여 명의 회원이 함께했지만 지금은 전국의 40명 정도가 활동 중이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요즘 같은 시대에 부채를 찾는 걸까?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나 소리꾼이 아닐까 예상했지만 햇살선자방 사람들은 세대와 성별을 불문하고 그냥 부채가 좋아서 모인 평범한 사람들이다. 재료부터 색깔, 크기 등 세세한 것 하나까지 고객의 취향을 파악해 명인은 세상에 하나뿐인 부채를 만든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달에 10만원씩 1년을 모아 작품 하나를 구입해가는 분들도있어요. 이유를 생각해보면, 남들은 갖지 못하는 하나뿐인 나만의 것을 갖는다는 매력이 있죠. 여름에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햇빛도 가리고 더위도 쫓는 용도로 부채를 매년 찾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은 가볍게 살랑거리는 바람을 선호하고, 어떤 분은 묵직한 바람을 좋아하세요. 부채를 드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죠.



칠접선(검정,빨강)



생활용품보다는 예술작품으로 

시간이 갈수록 부채를 찾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엄재수 명인은 부채가 이미 생활용품에서 한발 벗어났기 때문에 예술의 범위 안에서 정체성을 찾아야한다고 전한다. 작품으로서 가치 있는 합죽선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하며 예술적 수준을 높여나갈 계획이다.  


조선시대에 좋은 부채 하나는 쌀 한가마니와 바꿀 정도로 비싸고 귀했어요. 지금의 부채도 역시 저렴한 가격은 아니죠. 대신 그만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해요. 부채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살살 다루다보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지고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죠. 어떻게 보면 과거 선비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상징으로 부채를 든 것처럼 지금의 부채에도 그 정신이 담겨있다고 봐요.  



* 엄재수 선자장은 1963년 전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인 故엄주원 명장에게 부채 만드는 일을 어깨너머 배웠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이후 고향인 전주로 돌아와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업을 잇는 길에 들어섰다. 2012년 전라북도무형유산 선자장 합죽선 보유자로 지정. 현재는 아들인 엄창석 씨가 전수자로 합죽선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