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의 아버지이자 한글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독립유공자,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모은 국문학자이자 문학 교육자. 그 어떤 문학인보다 다양한 수식어로 소개되는 인물이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이다. 2017년 10월, 고즈넉한 익산 여산면 산자락 아래 가람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1891년, 가람 선생이 태어난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문학관과 함께 세 채의 소박한 초가로 이루어진 생가 ‘수우재’가 이곳이 그의 고향임을 알려준다. ‘분수를 지키며 바보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수우재란 이름은 이병기 선생의 꼿꼿한 정신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옆에는 ‘승운정’이라는 아담한 정자와 200여 년 같은 자리를 지킨 탱자나무가 함께한다.
독립유공자인 이병기 선생을 따라, 가람문학관은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시조를 음미하는 것부터 고전문학 보존, 국문학 정립, 한글 수호, 후학 양성의 길까지. 영상과 사진, 체험, 미디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선생의 생애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곳이다.
한글로 쓰인 가람일기
문학관 곳곳에서 가람 선생의 시조를 만난다. 그는 고시조가 현대시조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며 새로운 현대시조를 정의했다. 시조는 낡은 규범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창작하는 것이라며, 시조부흥운동을 이끈 인물이 바로 가람이다. 그의 시조는 학문적인 가치를 세운 동시에 우리 민족과 한글에 대한 사랑을 담아내고 있다. 이렇듯 가람이 걸어온 학문의 출발점은 곧 ‘한글’에 있다.
그는 한글을 지키기 위한 일념 하나로 1921년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획, 같은 해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어학회가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그리고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과 관련 인물들을 검거하며 한글 연구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가람 선생 역시 1년 동안 복역하며 고난을 겪었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한 문학인은 그를 두고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가람은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편의 친일 문장도 남긴 일이 없는 영광된 작가”라고.
가람 이병기(왼쪽)와 선생이 기거하며 후학을 기른 '양사재 가람다실'
가람의 다양한 면모와 업적이 이만큼 전해질 수 있었던 데에는 평생을 걸쳐 써온 일기가 큰 역할을 했다. 문학관 한쪽에 전시된 빛바랜 일기장들. 1909년부터 1966년까지 무려 60년 가까운 세월 써내려간 일기들이다. 이는 개인의 기록이면서 근현대사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처음에는 한문으로 쓰였던 일기가 1914년을 기점으로 한글로 쓰였다는 점 역시 주목된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말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았던 가람 이병기 선생. 문학관뿐 아니라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전주 한옥마을 가운데 자리한 ‘양사재’다. ‘선비를 기른다’는 뜻을 가진 이곳은 1951년부터 5년간 가람 이병기 선생이 기거하며 후학을 기른 장소다. 한동안 방치되었던 양사재는 다시 되살아나며 여행객이 머무르는 한옥 속소이자 문화공간이 되었다. 전주 다가공원 정상에 오르는 길에서도 가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곳에는 <시름>이라는 그의 시와 함께 가람시비가 우직하게 세워져 있다. 가람 선생은 여전히 우리 주변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머무르며 아름다운 국문학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가람문학관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76 ㅣ 063-832-1891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