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물드는 공간  2024.8월호

시, 숲을 품다

: 전주학산숲속시집도서관





오래된 아파트 단지 뒤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 아름다운 맏내호수와 학산이 반기는 이 길의 끝에는 푸르른 소나무들 사이로 너와 지붕을 인 작은 집이 있다. 어릴 적 동화 속에서 보았던 것 같은 숲속의 작은 도서관, 학산숲속시집도서관이다.


학산숲속시집도서관은 시집만으로 채워진 도서관이다. 2021년 문을 연 이곳은 자연 환경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산의 능선을 따라 설계되었다. 건물 벽면의 나무판자들도 책의 표지를 닮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통창이 하나의 액자가 되어 바깥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봄이면 꽃이, 여름에 초록 나무 숲이, 가을이면 단풍이, 겨울이면 나리는 눈발이 액자 속 풍경이 된다. 화창한 날이면 맏내호수의 윤슬을 볼 수 있고, 비가 오는 날에는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바로 옆에는 유아숲 놀이터가 있어 가끔은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운이 좋으면 귀여운 다람쥐 친구와도 만날 수 있다.


도서관에 비치된 3천 권이 넘는 시집은 '고르다', '선하다', '반하다', '다르다', '만나다' 다섯 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있다. '고르다'에는 문학동네, 민음사, 창비 등 국내 출판사의 시선집과 지역출판사인 모악의 시인선이 함께 있다. 다락방의 '선하다'는 눈에 생생하게 보인다는 뜻의 '선하다'에서 따왔다. 동시집과 시화집이 있어 가족이 함께 즐기기 좋다. '반하다'에는 '당신', '사랑', '이별' 등 자주 쓰이는 시어들로 시집을 모아두었다. '다르다'에는 일본 하이쿠 선집과 같은 외국어 원서 시집과 이상의 작품을 영역한 <이상 작품선> 등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본이 있다. '만나다'는 김용택, 안도현 등 친숙한 시인들의 친필 사인본이 있는 서가다.







수많은 시집들 중 어떤 시집을 꺼내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문학 자판기'의 도움을 받아 볼것을 추천한다. 문학 장르와 주제를 선택하면 무작위로 문학 속 한 구절이 영수증처럼 나온다. 문학 자판기의 기능이 궁금해 '시'와 '사랑'을 선택했더니 금세 만해 한용운의 「행복」을 추천했다. 시집의 표지에 달린 책갈피에 있는 추천 시를 보며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김용택 시인이 명예 관장으로 있는 이곳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서관이다. 그동안 김사인, 나희덕, 정호승, 유희경, 오은 등 많은 시인이 학산을 찾아 독자들을 만났다. 지난 7월에는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 이재영과 진은영 시인이 다녀갔다. 8월에는 박은선 시인, 피아니스트 배새롬과 베이시스트 이재성이 '숲속 낭독 공연'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학산시집도서관을 오랫동안 지켜온 사서 박금주씨는 학산을 ‘나무 계단 사이 피어난 잡초 하나에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시(詩)적인 공간’이라고 소개한다. 


도서관은 매월 한 편의 시를 추천한다. 7월의 시는 배한봉 시인의 *「빈 곳」이다. 학산도서관의 풍경이 이 시에 담겨 있다. 





빈 곳


배한봉


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

틈이 생명줄이다.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

틈이 생긴 구석.

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

언제든 안을 준비돼 있다고

자기 가슴 한쪽을 비워놓은 것.

틈은 아름다운 허점.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

꽃이 피는 곳.

빈곳이 걸어 나온다.

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오른 자리.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





 


학산숲속시집도서관

전주시 완산구 평화5길 36-58

063-714-3525 ㅣ 화-일 09:00-18:00 (동절기 17:00)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