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김용택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닭도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것이 잠깐이다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번 뿐인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 속에 왠일이냐. 개망초꽃이다.
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
하루종일이다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 세월 눈 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매미가 우는 여름날
새벽이다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맑은
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
이 시를 쓸 때는 전주에 살 때다. 더운 여름날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덥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기위한 것인데 움직이면 땀이 난다. 생각해보면 산다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기위해 상처주고 상처받고 괴롭고 힘들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상처받지 않은 영혼들이 있었던 것이다. 모면만하면 그만이라는 그런 땀나지 않은 메마른 영혼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러면 삶이 너무 허망하지 않는가 말이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삶이 없다면 정말 우리가 무엇으로 힘들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때로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날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한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삶이다.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 교직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장마
김사인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릉지나 한 덩어리 얻어 먹으러 갈까
긴긴 장마
꼭히 수타사겠는가. 불명산 화암사나 추줄산 위봉사도 좋고 말고!(누룽지 한 줌 적선하실 어진 공양주만 계신다면─)
이부자리마저 눅눅하고, 화투패로 일진 떼기도 하루이틀이지. 콩이라도 볶아 먹을까, 가리내 다리께로 물구경을 나설까.
그러나 길게는 걱정 마시라.
비 그쳐 잠자리떼 몰려나오고 땡볕에 고추가 다시 매워지면, 방학도 끝나고, 까맣게 그을은 우리 새끼들 불쑥 자라 있을테니.
김사인 시인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고려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2년 동인지 『시와 경제』의 창간 동인으로 시 쓰기를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 등이 있다. 동덕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임 후 전주에서 지내면서 지역의 시인들과 교류하며 인문학과 시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름
김영춘
여름에게선 달디 단 냄새가 난다
매달려 있는 열매에서도
숲속의 이파리에서도
오솔길의 풀무더기에서도
하나하나 달착지근한 냄새가 스몄다가 나온다
뛰어놀던 어린 것도
달디 단 땀 냄새와 함께 안겨온다
이럴 때 마당에서는
채송화와 봉숭아가 피어난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이다
여름은 모든 것이 달디 달아질 때까지
지독하게 구워서 익히는 모양이다
푹푹 찌는 날, 볼이 바알개져서 뛰어놀던 아이가 방문을 열고 덮치듯이 안겨온다. 땀에 젖은 어린 것에게서 달콤한 몸의 향이 스며있다가 나온다. 문 밖 마당에서는 봉숭아와 채송화가 절정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뙤약볕 아래서이다. 문득 신비로운 느낌 하나가 스쳐갔다. 힘든 시간을 통해 익어가는 것이구나. 익어 갈 때 좋은 냄새를 풍기는 것이로구나. 그 언저리에 우리들의 삶 한 조각이 놓여 있구나.
김영춘 시인은 1957년 고창 해리의 눈이 많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88년 《실천문학》 복간호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나비의 사상』, 『다정한 것에 대하여』 등의 시집을 펴냈다. 민중적 서정의 세계를 그려온 시들을 주로 선보이며 교사로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요즘은 전주에서 옛집이 있는 고창을 오가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소문 돌까 봐
박형진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등에 선득선득하니 좋다
밭 매고 있을 때 이러면 나는 늘
땀 젖어 달라붙은 옷들을 그냥 훌러덩
벗어 버리고만 싶다
외딴집 외딴 밭인데 누가 오리라구
내 오촌 당숙 한 분은 지게 지고 산밭에 갈 때면
등거리 하나 잠방이 하나였다
옷이 없어서라기보단
땀 젖고 해지는 게 싫어서였겠지
평생 소를 부리며 사셨던 뒷개 삼촌은
소나기 오는 날 짐댓거리 냇가에 매 둔 소를 끄지러 갈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으셨단다
나야 그걸 보지 못한 게 통한이지만
회관에 모여 앉은 아짐들이 깔깔대던 것을 생각하면
이 아니 흥겨운가 지금은
행여 옷 벗고 밭 매는 나를 보면
미쳤다 미쳤어 소문 돌까해 봐
시원스레 이 더운 날 소나기 한 줄기도
내리지 않는가 보다
시인이자 농부인 저는 유기농업을 하는 까닭에 김매는 일이 참 많답니다. 이 시를 쓸 때도 고추밭 고랑에서 풀을 매고 있었는데 소나기가 몇 방울 감질나게 오다가 말더라고요. 그래서 쓴 시에요.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 불볕더위 때 내리는 소나기는 답답한 삶을 순식간에 반전 시키지요. 이번 여름에는 소나기 좀 자주 왔으면 하고 바랍니다.
박형진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군 도청리 모항마을에서 태어났다. 1992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봄 편지」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 가고』, 『다시 들판에 서서』 등을 비롯해 『모항 막걸리집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 등의 산문집, 어린이책 『갯마을 하진이』, 『벌레 먹은 상추가 최고야』 등을 펴냈다.
한낮
이병초
이마빡 벗어지게 날 뜨건디
워딜 까질러댕길라고 옷을 또 챙겨 입냐고
어머니 부채를 확확확 부쳐댑니다
물 나는 자리 앉지 말라고 갈쳐놓응게
평생 마음이 배끼티 있던
즈아부지가 앉었던 자리만도 못허다고
언지나 고실고실헌 디서
옛날얘기 험서 살지 모르겄다고,
고구마순 껍질 벳겨서 장에 내다 판 돈으로
수의 장만해놨응게 농 위에 두면 오래 산대서
농 밑에 보따리 져놨응게 숨 꼴까닥 넘어가먼
고이 입혀 묻어달라고 어머니는 숨도 안 쉬고
앞산 꼭대기를 넘어갔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봉게
짐승들은 하루 네시간만 일험서 평생을 살든디
어찌서 나는 그 몇천배를 일혔어도
빼꼼헌 날이 말라비틀졌디야잉, 근디
에라잇 풀떼죽도 못 얻어 처먹을 똥강아지야
새 신발짝을 또 물어뜯어놨네잉
어머니 타박이 애먼 똥강아지로 옮겨간 사이에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
귀에 쏘옥쏙 박혔습니다
이 시를 쓸 때 나는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어디 나가지 말라고 어머니가 잔소리하면 할수록 나는 더 바깥이 궁금했다. 어머니 말씀 중에 "짐승들은 하루 네시간만 일험서 평생을 살든디 / 어찌서 나는 그 몇천배를 일혔어도 / 빼꼼헌 날이 말라비틀졌디야잉" 라는 구절을 나는 여태 가슴에 모시지 못하고 있다.
이병초 시인은 1963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1998년 문예계간지 《시안》에 연작시 「황방산의 달」이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밤비』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 시 비평집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와 역사소설 『노량의 바다』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