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도시를 읽는 방법  2024.9월호

펜 끝에서 살아나는 이웃의 이야기

: 로컬 일러스트레이터  박성민 


박성민 작가



검정 펜 하나로 도시를 읽어내는 사람. 전주 한옥마을과 오래된 식당, 슈퍼, 철물점 등 일정한 굵기의 선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종이 위로 익숙한 건물들을 뚝딱 지어낸다. 로컬 일러스트레이터 박성민 씨가 마을을 기록하는 방법(?)이다. 그는 ‘그리는’ 것을 넘어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직업 앞에 ‘로컬’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박성민 작가의 노트에는 도시의 어떤 장면들이 기록되고 있을까?


보는 이의 채색으로 완성되는 그림 

전주 효자동에 자리한 카페 ‘작가의 취향’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물론 그의 작품도 함께이다. 작가는 지난해 여름, 책과 커피, 드로잉 작품으로 채운 특별한 공간을 열었다. 그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그림들을 둘러본다. 그는 나고 자란 전주의 오래된 골목과 가게, 소소한 풍경을 그리는 작업을 한다. 색을 칠하지 않은 까만 스케치뿐이지만 이상하게 정겹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맑은 낮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노을 지는 저녁하늘이 상상되기도 한다. 


“채색을 하는 순간 이 풍경들이 틀에 갇힌다고 생각해요. 장소에 대한 추억과 계절, 시간, 날씨를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두는 거죠. 주변의 가게들을 그릴 때는 주인 분들의 성향이 묻어나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냥 보면 비슷한 미용실이지만 유심히 바라보면 사장님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그리다보면 그 특징들이 도드라져요.”


가끔은 재미난 시도를 하기도 한다. 완산초등학교 옆, 셔터가 내려진지 오래인 건물 하나가 어느 날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만약 나라면 저기에 멋진 카페를 열 텐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낡은 셔터문 대신 예쁜 카페를 그려 넣었다. 죽어있는 건물을 그림 속에서나마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해당 그림을 업로드하자 어디냐고 묻는 메시지가 쏟아져 해명(?)을 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박성민 



©박성민





세상에 하나뿐인 기념품의 탄생 

작가의 첫 기록은 한옥마을의 명소들이었다. 무얼 그려야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던 시기,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는 무작정 밖으로 나가 그릴 것을 찾았다. 그렇게 한옥마을의 풍경을 간단히 드로잉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그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전 웹툰작가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가며 진짜 그리고 싶은 걸 찾아야했다. 나의 속도대로 도시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 그에게 필요한 그림이 그때 찾아온 것이다. 도시의 풍경을 따라 느리게 펜을 움직이며 그는 하나둘 새로운 도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드로잉을 시작하고 서울 인사동에 간 적이 있는데요. 거기에 파는 기념품을 한옥마을에 똑같이 팔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당시 한옥마을이 관광지로 막 인기를 얻던 시기였는데, 사람들이 부담 없이 기념할만한 게 뭐 없을까 고민하다가 드로잉으로 엽서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남부시장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작은 매대에서 드로잉 엽서를 판매했다. 1년 가까이 하다 보니 청년몰 안에 작업실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감성민 작화실’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작업실 겸 갤러리를 5년 간 운영하며 그는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전주의 원도심과 오래된 거리, 시장 등 당시 작업실 주변을 산책하며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이제 도심 가운데로 거처를 옮기며 작업 환경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고 전한다. 


“우리가 농촌생활을 하면 집 앞 텃밭에 나가서 먹고 싶은걸 쉽게 따먹을 수 있잖아요. 예전에는 그렇게 텃밭에 나가듯 일상처럼 작업을 했는데, 지금은 멀리 장을 보러 가듯 작업에 시간을 따로 써야 해요. 그 점이 아무래도 많이 달라졌죠.”



카페 '작가의 취향'



전주의 매력을 책 한 권에 담아 

개인적인 작업 환경에는 아쉬운 변화가 생겼지만 반대로 반가운 변화도 있다. 최근 드로잉 클래스를 열며 사람들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12명의 수강생이 나뉘어 카페에 모이고 펜을 든다. 저 멀리 경북 구미에서도 왕복 4시간을 달려오는 학생이 있단다. 덕분에 작가는 또 다른 부분에서 큰 에너지를 얻고 있다. 이곳에서 첫 전시를 열기도 했다. 낙서처럼 끄적거리며 완성한 작품 100여 점을 모아 개인전 ‘낙스전’을 선보였다. 앞으로의 꿈은 드로잉 삽화에 이야기를 더해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틈틈이 글도 쓰며 꿈에 다가가고 있다. 정해진 목표 같은 건 세우지 않았다. 스스로 지치지 않도록, 즐기면서 작업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면 도시를 더욱 자세히 보게 되는데요. 전주는 몇 년 사이 관광지가 늘고,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그 사이에 오래된 구도심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죠. 그래서 전주의 매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잘 어우러진 도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도시가 갖는 특징이겠지만 전주는 좀 더 압축된 모습이라고 할까요? 과거와 미래가 옹기종기 공존하는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