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출판사  2024.12월호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 단순한 믿음으로

: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


서정환 대표



건물을 튼튼히 짓기 위해서는 먼저 기둥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전북의 출판 역사가 무너지지 않고 서있는 이유 역시 중심을 지키는 기둥이 있기에 가능했다. 전주에 자리한 장수 출판사 ‘신아출판사’의 이야기다. 1970년 문을 연 이곳은 올해로 54년이 되었다.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서정환 대표는 여든넷의 나이에도 매일 출판사로 출퇴근하는 현역 출판인이다. 아침 8시 30분마다 직원들과 모여 회의를 하고, 늦은 시간까지 남아 직접 교정을 본다. 그렇게 남다른 열정으로 기획하고 찍어낸 책이 5천여 종이 넘는다. 


그 한 권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기획부터 인쇄, 제본까지 출판의 전 과정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인쇄소와 출판사의 역할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두 영역이 철저히 분업화된 요즘은 보기 드문 풍경. 신아출판사의 출발은 원래 인쇄업이었다. 스무살 무렵의 서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신문기자로 일하며 부업으로 인쇄 일을 배웠다. 공문 하나를 보낼 때도 종이가 필요하던 시절, 본격적으로 인쇄소 ‘신아문예사’를 차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전주가 간직한 완판본의 역사를 주목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출판까지 영역을 넓히며 지금의 ‘신아출판사’가 탄생했다. 완판본의 맥을 잇겠다는 사명감으로 버티다보니 어느새 50년, 지금도 전주 완판본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누구보다 크다. 


과거 전주에서는 오일장이 열릴 때 완판본을 늘어놓고 팔기도 했어요. 그만큼 완판본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서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었죠. 단순히 책을 찍어내는 인쇄 기술의 의미를 넘어서 사람들의 생각을 깨우고, 문화를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역사임에도 잘 조명이 되지 않아 안타깝지요.



신아출판사의 대표잡지 <수필과 비평>, 첫 정기간행물 <소년문학>




신아출판사에서는 현재 11종의 정기간행물을 발간하고 있다. 긴 역사만큼 각 잡지의 경력도 화려하다. 1992년 출간된 〈수필과 비평〉은 신아의 정체성을 이루는 대표적인 잡지다. 수필이 문학으로 인정받기 어렵던 과거,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을 꿈꾸며 펴냈던 책이다. 이 외에도 〈여행문화〉, 〈계간문예〉, 〈인간과 문학〉, 〈시〉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아우르며 지역에 묵묵히 인문학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갈수록 힘이 부치는 순간도 찾아온다. 1990년 가장 먼저 선보였던 문예지인 〈소년문학〉은 30년 넘게 월간으로 발간해왔지만 내년부터는 계간지로 펴낼 예정이다. 갈수록 작아지는 문학의 힘이 이제는 피부에 와닿는 현실. 그는 이 책들이 돈이 되지 않더라도, 저마다 역할과 의미가 있음을 믿는다. 


초창기에는 교수님들한테 원고 하나를 부탁하는 일도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희가 신아출판사라는 이름으로 잡지를 꾸준히 잘 만들어놓으니, 좋은 원고를 받고 책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지는 거예요. 그렇게 수필부터 시, 아동문학까지 다양한 분야의 잡지와 책을 만들고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었죠.


기존의 잡지들을 지키는 일도 버겁지만 그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한다. 지난 2018년에는 〈전북문화살롱〉이라는 새로운 인문학잡지를 만들었다.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발굴하고 예술가들이 의견을 나누는 장이 되길 바라며 직접 아이템을 찾고, 필자를 섭외하고 원고를 모은다. 손에 들면 꽤나 묵직한 이 잡지 한 권에는 짧은 영상으로는 누릴 수 없는 귀한 글맛과 이야기가 담겨있다.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신아출판사 인쇄소




지금이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책은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해요. 종이로 기록해놓은 것들은 결국 오래 가고, 언제든 바로 꺼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스마트폰으로 단편적인 일은 할 수 있어도 무언가 깊이 있게 공부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영상과 책은 그 역할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책이 사라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 일을 꾸준히 해나가고 있어요.


오랜 시간 이 자리를 지켜낸 비결(?)은 종이책만이 가진 쓸모를 우직하게 믿는 것이었다. 그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문인들에게도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넉넉하지 않던 시절에는 아무 대가 없이 책을 만들어주는 일도 참 많았다. 크고 작은 문학상을 제정해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이는 서 대표가 출판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역할과도 맞닿아있다. 그는 좋은 필자를 많이 알고 발견해내는 안목이 중요하다고 전한다. 부지런히 움직여 다양한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일. 그것이 출판사의 역할이라고 덧붙인다. 


신아출판사에는 현재 30여 명의 직원이 함께하고 있다. 매일 3~4종의 따끈따끈한 책들이 이곳에서 탄생한다. 오늘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할지 모를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질 수 있는’ 책으로 엮이고 있다. 책을 펼치기 전, 늘 저자의 이름만 눈여겨봤다면 앞으로는 출판사의 이름도 한 번쯤 더듬어 보자. 쓰는 일만큼 대단한 것이 만드는 일임을, 신아출판사가 걸어온 시간에서 그 힘을 새삼 깨닫는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