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수 대표
눈앞에 보이는 아무 책을 하나 집어보자. 그리고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간기면'을 펼쳐보자. 판권면이라 불리기도 하는 간기면은 책의 엔딩크레딧과도 같다. 출판법에 따라 저자와 발행일 등 책의 기본 정보, 출판사의 이름과 ‘주소'를 표기해야하는 지면이다. 여기 표기된 출판사 주소는 열에 아홉이 서울이나 파주다. 그리고 열에 하나, 쉽지 않게 만나게 되는 출판사는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며 출판의 맥을 잇고 있는 이른바 ’지역출판사‘다. 전주에도 그런 출판사들이 있다. 흐름출판사도 그 하나다. 높은 책장과 종이 냄새로 둘러싸인 전주시 인후동 흐름 사무실에서 한명수 대표를 만났다.
흐름은 2002년 시작해 올해로 스무 해를 넘긴 청년(?) 출판사다. 처음부터 출판일을 하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한 대표는 홍보물 등 디자인 사업을 먼저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평소 친분이 있던 신부님을 통해 접한 한 원고가 출판의 길로 이끌었다. 흐름이 처음으로 펴낸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다.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 천주교 신자였던 세 남매가 사형을 기다리며 쓴 편지글. 절절한 마음이 담긴 그 글들을 엮으며 그동안의 일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기쁨을 찾았다.
홍보물은 금방 없어져요. 잠깐 일하고 결과물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만 책은 한 번 인쇄하면 계속 가는 거잖아요. 출판은 영원히 남는 걸 만드는구나, 거기서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완성될 때마다 느껴지는 그 보람이 지금의 흐름을 만들었어요. 힘들고 지난한 일의 연속이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게 출판이죠.
처음으로 발행한 책 <이순이 루갈다 남매:옥중편지>와 역사서 <추안급국안>
종교서로 시작된 출판은 자연스럽게 역사, 고전 등 인문학 서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조선시대 중죄인의 조사 판결문을 모은 책 <추안급국안>, 조선 후기 인문지리서인 <국역여지도서> 등 학술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는 고전번역서들을 많이 펴냈다. 흐름은 인문학 외에도 산문집, 자기계발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다룬다. 독자가 읽기에 가치 있는 원고라고 판단되면 장르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의 딱 한 음만 눌러봐도 느낌이 온다잖아요. 출판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원고의 머릿말만 보아도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죠. 이 글이 좋은 글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출판사를 할 수 있어요.
그에겐 그동안 펴낸 책들이 피붙이처럼 느껴진단다. 그는 출판을 '고등학생과도 같은 원고를 잘 다듬어 대학에 보내고 사회에 진출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대학은 서점, 사회 진출은 독자들의 구매 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원고를 받으면 먼저 꼼꼼하게 읽고, 보기 좋게 다듬는다. 분량이 반으로 줄어들거나 글의 순서를 뒤집는 경우도 있다. 저자와 불편한 상황이 생길지언정 독자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평가한다. 필요한 사진이 있다면 출사를 나가기도 한다. 류은경 작가의 장편소설 <해미>의 표지도 한 대표가 해미읍성의 나무를 직접 촬영하여 만들었다. 어느 하나 그의 손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피붙이라 느낄 만하다.
흐름출판사에서 펴낸 책들
그는 전주에서 출판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이 크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크다. 전주에 있는 출판사들은 대부분이 디자인이나 인쇄업을 겸하고 있는 상황. 흐름과 같은 전문 출판사를 찾아보기 힘들고 그마저도 문을 닫거나 서울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독서대전과 전주책쾌 등 출판과 관련된 행사나 문화공간은 많지만 정작 출판사는 줄어드는 환경은 아이러니하다.
완판본의 도시라는 역사는 존재하죠. 그런데 완판본의 도시여서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고, 미래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확실한 것이 없잖아요. 그 역사를 후대에도 남기려면 결국 지역출판사가 중심이 돼야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 지금 신아출판사랑 저희 말고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출판사가 많으면 서로 건강한 경쟁도 하고, 정보 공유도 하면서 평균적인 질이 좋아질 텐데 그런 부분이 좀 아쉬워요.
'이 책 지방에서 했네'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그는 매번 최선을 다한다. 그 노력을 인정하듯 한 번 연을 맺은 곳에서는 계속해서 의뢰가 온다. 종종 서울의 원고를 받아 책을 만들 때도 있다. 흐름의 책들은 이미 지방출판사라고 완성도가 부족할 것이라는 것은 편견을 깬지 오래다. 다만 현실적인 어려움이라면, '좋은 원고'가 부족하다는 것. 저자를 확보할 수 있도록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지역 작가들도 이왕이면 지역을 먼저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전북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면 기획 출판의 즐거움이 더 커진다는 흐름은 대중적인 책을 기획하고 있다. 한 대표의 설명을 빌리자면 '전주역에서 읽기 시작해서 용산역에 내렸을 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는 책'이다. 간결하고 재미있는 문장으로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지적인 부분까지도 충족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단다.
흐름이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니 누군가 완판본의 미래를 묻는다면, 흐름과 같은 지역출판사가 그 맥을 이을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