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 대표
반듯한 새 책과 신간이 가득한 서점 바로 옆 자리에는 빛바랜 종이와 쿰쿰한 책 냄새가 풍기는 헌책방 ‘한가네서점’이 있다. 50년 가까운 세월 이곳을 운영 중인 최창근 사장은 동문거리가 지나온 역사를 함께한 산증인(?)이다. 그는 여느 직장인처럼, 매일 9시부터 6시까지 책방의 유리문을 활짝 열어둔다. 수많은 책이 담장처럼 쌓여 한 사람이 겨우 지날만한 좁은 길을 만들어내면, 그 길목을 요리조리 거닐며 손님들은 책을 고른다. 책값은 보통 3천원에서 4천원. 여러 권 골라 담아도 부담이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헌책은 인기가 없다. 책 한권이 귀했던 가난한 시절에야 헌책을 찾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책이 흔해진 지금 헌책방의 역할은 대개 ‘추억의 공간’으로 그치는 편이다.
한 번은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3대 가족이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런데 30분을 넘게 구경하면서 추억 이야기만 나누는 거예요. 가끔은 젊은 사람들이 데이트를 하다 들르기도 하는데 읽었던 책을 발견하면 또 30분 동안 그 책에 대해 이야기만 나누고 갑니다. 책은 안사고 구경만하니 장사에는 도움이 하나도 안돼요.(웃음) 그래도 이곳이 없어지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게 되지요.
학창시절 서점에 다니던 손님이 중년이 되어 다시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헌책은 이제 경쟁력을 잃었지만 공간은 아직 힘이 남아있음을 사람들을 통해 느낀다. 헌책방에 얽힌 많은 추억이 말해주듯, 90년대만 해도 이곳의 인기는 대단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참고서를 사러 오는 학생들이 쏟아져 밥도 거르고 영업을 했다. 아르바이트생을 7명이나 두는 건 물론, 이때 번 돈으로 1년을 먹고살 정도였으니 그 시절 최고의 ‘핫플’이라 할만하다. 헌책방은 그렇게 어려운 시절 사람들을 품어주던 장소였다.
손님들과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아요. 옛날에 쌀포대를 들고 찾아와서 책과 바꿔달라고 한 분도 있었어요. 그땐 쌀도 귀할 때라 기꺼이 책을 내주었죠. 항상 우리 집에서 책을 사가던 학생도 있었는데 어느 날 서울대학교에 붙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같이 밥 한 끼를 나누기도 했죠.
기억 속 다양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는 새삼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언젠가는 코트 안에 무려 11권의 책을 훔쳐 달아나려 한 손님도 있었단다. 한두 권 정도는 눈 감아 주던 사장님도 그때만큼은 두고 볼 수 없었지만 차마 신고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지금의 책방을 지켜낸 힘에는 다정한 마음도 큰 몫을 차지한 듯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세상은 점점 달라졌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헌책방은 반대로 위기를 맞았다. 한가네서점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던 각종 사전은 디지털 기기가 등장하며 한순간에 판매가 뚝 끊겼다. 여고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세계문학전집 등 문학 책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대형 중고서점인 ‘알라딘’이 등장하면서부터 지역의 작은 헌책방들은 직격타를 맞았다. 헌책이 사랑받던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지만 최창근 사장은 책에도 유행이 있다고 말한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이제는 이 공간을 지켜내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되었다.
처음 서점을 열 때만해도 거리 양쪽으로 서점이 엄청났어요.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식사도 하고 계절마다 같이 여행도 다니며 모임도 활발히 가졌죠. 제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특별한 게 아니라 책이 좋은 것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어서예요. 돈만 생각해서는 절대 버틸 수가 없어요. 자기가 좋아서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죠.
‘청파서점’, ‘책과 사람들’, ‘계몽’ 등 그는 나란히 함께했던 옆집, 앞집의 서점 이름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많던 이웃들이 다 떠나가고, 외로운 현실에도 꿋꿋이 버틴 덕에 집안의 장남으로서 생계를 책임졌다. 3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자식들도 무사히 길러낼 수 있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 그는 힘이 닿는 한 끝까지 서점을 지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곳이 더욱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문제들도 무시할 수 없다. 한가네서점은 시민들의 추억과 역사가 깃든 공간으로서 보존 가치를 인정받은 ‘전주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정작 실질적인 지원은 전혀 없다. 헌책 활용 등에 대한 정책적인 지원이나 대안을 고민한다면 우리가 잃고 싶지 않은 공간을 우리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