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곤
한글은 문자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조형미는 다른 문자에서는 볼 수 없는, 과학적이고도 특별한 감성이 있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서일까. 일상 속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기회는 많지 않다.
그렇다면 한글을 화선지에 옮겨보면 어떨까. 은은한 묵향과 함께, 점을 찍고 획을 그으며 만들어지는 무한한 한글서예의 세계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한다. 오래전부터 한글서예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져온 한 서예가가 있다. 죽봉 임성곤씨다.
우리것을 사랑하는 마음
그의 어린시절, 교과과정에는 서예 시간이 있었다. 붓을 잡고 먹으로 글씨를 쓰는 일은 어린 그를 매료시켰다. 서예가 좋았다. 열아홉 살에 이른 취업을 하면서, 그는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꿈이 떠올랐다. 곧장 서예 학원에 등록했다. 처음 4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원에 다녔다. 글씨를 쓸 때 그는 행복했다. 학원에 오래 머물 수 없는 날에는 선생님이 채본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가곤 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주변에서 학원을 운영해 보라는 권유가 이어졌다. 오랜 고민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 학원을 열기로 결심했다. 본격적인 서예가의 길이 시작되었다.
임성곤 작품
스승은 그에게 ‘죽봉’이라는 호를 주었다. 대나무처럼 곧게 우뚝 서라는 의미였다.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특별한 신념이 있었다. 전라북도는 예로부터 서예로 유명했지만, 그 명성에 비해 한글서예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한글서예에 매진했다. 한글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연구로 지역에서는 드물게 대한민국서예전람회(국전)에 한글 부문 초대작가가 되었다. 전라북도예술회관에서 열었던 첫 번째 개인전은 평소 좋아하던 이해인 수녀의 시를 담은 작품들로 꾸렸다.
한글서예는 내 감정을 오롯이 느껴가며 쓸 수 있어요. 한자는 아무리 그 뜻을 다 알고 있어도, 글씨 쓰는 데 집중하다 보면 무슨 뜻인지 곧잘 잊어버리게 돼요. 특히나 지금 젊은 세대들은 한자에 익숙하지 않잖아요. 서예의 미래를 생각할 때,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글서예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의 서예 작품에는 우리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호성동에 있는 그의 서실에 들어서면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눈에 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작품, 독립운동을 주제로 쓴 작품들도 이어진다. 최근에는 김용택 시인의 '참교육 이야기'를 인용하여 쓴 <대한민국>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배경이 담긴 글이다. 독도명예주민홍보대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배경으로 독도를 주제로 한 작품을 여럿 쓰기도 했다.
전북한글서예협회 서예가들이 완성한 훈민정음 서문
108명의 작가, 108개의 글자
한글서예를 사랑한 오랜 마음을 담아 지난 24년 6월, 전북한글서예협회를 창립했다. 이를 기념하여 4개월에 걸친 특별한 프로젝트도 선보였다. 180명의 서예가가 훈민정음 서문 108자를 각자 한 자씩 쓰고 조각하여 전시한 것. 내년에는 전북 지역 시인의 시 한 편을 선정해 작품을 완성할 계획이다. 이번에는 판본체로 통일하여 만들었지만, 내년에는 참여자들이 원하는 서체를 자유롭게 사용해 글자를 표현할 예정이다. 각기 다른 매력의 글자가 하나씩 조합하여 시 한 편이 완성되는 것이다.
중국 청도 서예단체와의 교류전도 준비 중이다. 원래는 두 나라의 서예 작품을 서로 감상하는 방식으로 계획했지만, 최근 한글서예가 국가무형유산에 등재되며 생각이 바뀌었다. 중국에 한글서예를 계기로 우리의 한글을 조금 더 깊게 알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중국 작가들에게 한글서예 작품을 써달라고 할 계획이에요. 각자 한글을 보고 느낀 대로 그냥 마음껏 한번 써보라. 그들에겐 낯설겠지만 또 하나의 예술이 될 수도 있거든요. 옛것에 머물러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연구는 항상 필요합니다. 이런 전시를 계기로 특별한 서체도 나올 수 있지 않겠어요?
'법고창신'의 의미를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한글서예의 대중화를 위해 늘 새로운 변화를 고민한다. 한글서예에 관심이 있다며 찾아올 청년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바람은 먼 훗날의 후손들에게 한글서예가 좋은 유산으로 남는 것이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