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화
작년 울산대학교 도서관에서 일어난 '장서 폐기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도서관 전체 장서인 92만 권 중 27만 권이 폐기됐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당초 45만 권에서 인문대학 교수들의 반발로 줄어든 것이다. 이유는 도서관 리모델링 때문이었다. 도서관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하며 카페 분위기의 라운지와 열람실이 들어서게 되자 정작 책을 위한 공간이 부족해졌다. 울산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 공공도서관과 대학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이 버려지고 있다. 그 많은 책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전주의 한 고등학교 도서관은 폐기 처리된 책을 공예 작가의 작업실로 보낸다. 헌책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페이퍼 아티스트, 이진화 씨의 작업실이다. 그는 의미 없이 버려지는 책들에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예술 작품을 선보인다. 종이를 접고 잘라서 페이지 사이 숨어 있었던 그림들을 꺼내 보인다.
무수히 접어지는 종이로 만드는 예술
멀리서 보기에 동그란 도자기처럼 보이는 작품. 가까이 다가가면 직선인 종이를 무수히 자르고, 접어내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평소 전통 도자기를 좋아하는 그가 한국 도자기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을 표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북자기' 연작이다. 아인슈타인, 마릴린 먼로 등 세계 위인들도 눈에 띈다. 이 역시 종이를 촘촘하게 잘라내어 부드러운 머릿결과 얼굴의 주름을 표현했다. 때로는 기하학적 패턴을 표현하기도 하고, <책 속의 자유>와 같이 추상적인 작품도 있다. 이진화 작가처럼 종이를 이용하여 입체적인 작품을 만드는 예술 장르를 '페이퍼 아트'라고 한다.
기하학의 예술
북자기 2
2017년부터 헌책으로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페이퍼 아트의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제가 시작할 때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어요. 특히 지역에는 배울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아 인터넷에서 외국의 사례들을 찾아가며 공부했어요. 지금의 작업 방식이 자리 잡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작업 방식은 체계적이고, 수학적이다. 먼저 표현하고 싶은 그림을 스케치한다. 때로는 책의 내용이 그림을 정한다. 평화와 인권에 관한 책이라면 인권운동가의 얼굴을 그려 넣는 식이다. 스케치가 끝나면 배경이 될 책의 높이, 페이지 수에 맞게 음각과 양각으로 표현할 부분을 각각 계산한다. 이후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도안을 만들면 본격적으로 종이를 자르고, 접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는 사실 공예와는 거리가 먼 화학을 전공했다. 어린 딸이 종이접기를 좋아해 수업을 듣게 했는데, 옆에서 바라보기에 재밌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에는 딸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종이를 만지고 있으면 행복했다. 함께 종이접기를 배우던 딸이 어린이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종이에 대한 사랑은 계속됐다. 작업이 계속되니 자연스레 대한민국 미술대전, 전국한지공예대전 등에서 상을 받으며 공예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지금은 용머리고개 근처에서 '종이문화연구소'를 운영한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개인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헌책에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학교에서 종이접기 강사를 하면서 느끼는 게 있었어요. 요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이 없다는 것이요. 재료를 낭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자기 물건을 잃어버려도 아쉬워하지 않아요. 워낙 풍족한 시대이니 새로 사는 걸 당연하게 느끼는 거겠죠. 그런 걸 보면서 환경 교육에 대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우리 세대까지는 괜찮을지 몰라도,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면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헌책에 대한 관심은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시작됐다. 환경 교육의 필요성을 체감했지만, 단순한 말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찾은 것이 헌책이었다. 버려지는 물건들로 작품을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랐다. 가장 먼저 집에 있던 오래된 책들이 새 생명을 얻었다. 자녀들을 키울 때 샀던 육아 관련 도서와 동화책들이다. 십여년 전 마땅히 육아 조언을 구할 곳이 없던 그에게 책은 선생님이 되어주었고, 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의미가 깊지만 읽을 때가 지난 이 책들이 첫 헌책 작품의 재료가 되었다.
공예 수업에도 재활용을 접목하려고 노력합니다. 버려지는 종이로 종이죽을 만드는 수업인데요. 날짜가 지난 신문에 최근 화났던 일을 써보라고 해요. '여기에 쓰는 내용은 너밖에 모를 거야, 욕을 써도 괜찮아'라고요. 그리고 막 구긴 다음 던지면서 놀아요. 그걸 다시 찢고, 갈아서 만든 종이죽으로 새로운 작품을 완성합니다.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는데, 풀 곳이 없거든요. 수업을 통해 환경을 생각하고 스트레스도 해소하는 거죠.
최근 관심사는 헌책에 다른 업사이클링 소재를 더하는 것이다. 작년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가졌던 전시에서는 헌책과 한지가 만났다. 한지 또한 버려지는 자투리 종이가 많다. 이러한 자투리 종이를 얻어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고서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고서와 한지 모두 오랜 역사와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영감이 되었다. 이 외에도 폐유리, 폐전선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폐품들을 헌책과 함께 작품으로 구상하여 다시 한번 호명해 주고 싶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