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선
재활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실천, ‘새활용’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익숙해졌다. 새활용은 버려진 물건을 새로운 디자인과 활용도를 더해 가치 있는 물건으로 재탄생 시키는 ‘업사이클’의 우리말로 통한다. 국내에서는 해외보다는 비교적 늦게 새활용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에도 새활용과 관련된 움직임들이 하나둘 늘며 여러 디자이너와 예술가, 기업들이 동참하고 있다. 순수예술을 향한 ‘작품’보다는 실용적인 ‘제품’에 가까운 개념이기 때문에 새활용 활동은 전문 예술가들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손의 가치를 믿으며 작품을 빚어온 공예작가 조양선 씨는 자신의 작업에 새활용을 더하며 새로운 가치를 전하고 있다. 예술성과 실용성 그 사이, 환경을 살리는 새활용 예술은 어떻게 탄생할까.
세상에 없던 ‘비닐클링’의 탄생
10여 년 전, 전주 한옥마을 가운데 바느질 공방을 연 작가는 아기자기한 퀼트작품과 가방 등의 소품을 주로 제작해왔다. 당시 공방을 오가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보며 작가는 생각했다. 유행 따라 변화하는 우리의 옷차림과 다르게 그들이 입은 옷, 손에 든 가방은 평범하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낡은 느낌이 오히려 멋스럽게 다가왔다. 내가 만든 가방도 사람들이 오래오래 버리지 않고 옆에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튼튼한 천 소재를 찾아 공부한 끝에 천에 초를 입힌 왁싱천을 만났다. 가벼우면서 탄탄한 이 원단을 버려진 에코백 위에 씌워 오래 쓸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작업은 새활용과 밀접하게 닿아있진 않았다. 본격적인 계기는 2021년, 새활용 생산과 소비의 활성화를 위해 문을 연 전주시새활용센터와의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개관 기념 전시에 참여하게 된 작가는 새로운 새활용 제품을 고민해야했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비닐봉지에 주목했다. 비닐과 업사이클링을 연결해 ‘비닐클링’이라는 자신만의 제목을 달고 버려진 비닐을 재료로 활용했다. 이런저런 실험을 계속하며 그는 자신의 작업 반경을 넓혀나갔다.
그때는 제가 하는 작업이 재활용이나 업사이클링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생각 없이 그냥 했던 것 같아요. 버려진 에코백을 활용하는 것 하나도 업사이클이라는 단어를 붙이니 그 범주로 볼 수 있더라고요. 덕분에 새활용 관련 전시를 할 수 있었고 그게 좋은 경험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오게 되었죠.
왁싱천으로 제작한 가방
비닐클링으로 만든 화병
한 장은 약하지만 여러 장은 강하다
작가의 비닐클링 작업은 보기보다 까다로운 공정을 거친다. 쓰고 버린 비닐을 여러 장 수집해 먼저 깨끗이 세척하고 말리는 일부터 시작한다. 준비된 비닐은 색의 조합을 고려해 여러 장 겹쳐 다림질해준다. 열처리를 통해 하나로 압축된 비닐은 마치 한지처럼 자글자글한 질감을 내며 오묘한 매력을 풍긴다. 이 과정을 통해 비닐 한 장은 약하지만 여러 장은 강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완성된 비닐 원단은 손바느질도 가능하다. 파우치나 가방, 필통 등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사용된 재료가 모두 다르다보니 디자인도 가지각색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이 탄생한다.
비닐을 활용한 이러한 새활용은 현재 여러 작가들이 사용하는 보편화된 작업 방식이 되었다. 작가는 나아가 새활용의 제작 과정과 의미를 전하는 교육 활동에도 집중하고 있다. 대부분 소비자는 버려진 것을 소재로 한다는 이유로 새활용 제품에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작가의 노력과 시간, 환경을 생각한 가치 등 재료 뒤에 가려진 부분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새활용의 가치를 직접 경험하며 이해와 인식이 높아지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비닐 업사이클링 수업을 하면 재료를 본인이 직접 가져오도록 해요. 모아지는 비닐의 종류도 사람의 생활패턴에 따라 다르거든요. 자기가 실제 사용했던 비닐을 재료로 하면 더욱 재밌어지는 법이죠. 비닐 자체의 모양이나 다리는 방법, 디자인에 따라 다양한 완성품이 나오기 때문에 다들 재밌어하세요. 1년 동안 1인당 사용하는 비닐의 양이 천 장이 넘는다고 하는데요. 아예 안 쓸 수는 없는 현실이니 대신 오래 두고 쓸 수 있는 방법을 전파하는 거죠.
사랑받는 새활용 브랜드를 위해
이제는 비닐뿐 아니라 현수막이나 배너, 폐우산, 천막 등 다양한 폐기물이 그의 소재가 된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CGV와 함께한 협업이다. 극장의 의자 커버로 쓰였던 헌 천을 이용해 가방과 파우치를 만들었다. 가운데에는 친환경 종이 가죽을 더해 디자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완전한 새활용 제품이 아니더라도 일부를 재활용 소재로 활용한다면 그 또한 환경에 도움이 되는 실천임을 느꼈다.
다른 재료를 같이 사용하면 오염된 부분을 가려줄 수도 있고 깔끔한 느낌을 줄 수 있어요. 새것과 헌 것이 만났을 때 주는 묵직한 매력이 있거든요. 업사이클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일단 다른 소재와 더하는 것부터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라도 시도하는 작가님들이 많아진다면 좋을 것 같아요.
언젠가 새로운 새활용 브랜드를 선보이길 꿈꾸며 그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벽도 높다. 컨테이너 하나를 채울 만큼 많은 양의 폐기물을 수집하는 일부터 숙제다. 여러 자원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제품화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시스템도 필요하다. 세계적인 업사이클링 가방 브랜드인 ‘프라이탁’이 문득 떠오른다. 프라이탁의 제품은 최소 20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에 판매되지만 젊은 층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재활용을 원칙으로 하는 기업의 정체성과 희소성 있는 제품, 의식 있는 소비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까지. 많은 노력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국내를 대표하는 새활용 브랜드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함께 관심을 갖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언젠가 한국판(?) 프라이탁이 등장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