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다시 태어나다  2025.4월호

수많은 장승으로 숲을 이루다

민속공예가 윤흥관




마을 입구마다 장승 한 쌍이 버티고 서있던 시절이 있었다. 우뚝 솟은 키에 부릅뜬 눈, 커다란 입이 무섭기도 하지만 장승은 그만큼 굳세고 듬직한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장승은 흔히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나무를 깎고, 함께 세우는 공동체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순창 복흥면의 한 동네는 한 명의 예술가로 인해 마을 전체가 장승마을이 되었다. 현재의 추령장승촌 촌장이자 평생 나무와 동고동락한 민속공예가 윤흥관 씨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없던 마을에 장승 하나를 세우고, 두 개를 세우고, 긴 세월을 지나며 다양한 얼굴의 장승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쓰러진 나무를 다시 땅 위에 세우며 사라져가는 민속문화를 일으키는 사람, 윤흥관 장인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일까.


나무가 살던 땅 위로 다시

세상의 어떤 나무든 장승이 될 수 있다. 과거에는 주변의 흔한 소나무가 주로 활용되었지만 지금은 밤나무부터 아카시아, 오동나무, 메타세쿼이아 등 다양한 나무가 쓰인다. 그중 장인과 호흡이 잘 맞는 나무는 메타세쿼이아다. 덩치가 큰 만큼 표현할 수 있는 영역도 넓은 덕이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구상하는 장승의 형태는 조금씩 달라진다. 여기에는 나무가 있던 자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양지에서 자란 나무와 음지에 있던 나무를 구분해 양의 기운이 강한 나무는 남자 장승으로, 음의 기운을 가진 나무는 여자 장승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지금이야 옛날과 비교하면 나무 구하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다. 목재소를 통해 원하는 나무를 구하고 지역의 벌목한 나무나 피해목, 고사목 등을 가져다 사용하기도 한다. 수많은 나무를 만지며 살다 보니 그에게는 유독 기억에 남는 나무도 있다. 


오래전 태풍 매미가 왔을 때 있지? 그때 마을의 정자도 다 무너지고 엄청 큰 참나무가 쓰러졌어. 마을에서 그 나무를 좀 처리해달라고 부탁을 하니 일단 가지고 왔지. 그리고 다음 가을에 장승축제를 열 때 그 나무로 엄청나게 큰 장승을 만들어서 세웠어요. 동네 사람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고. 참 사연이 깊은 장승이지.

 




보통 장승 하나를 만드는 데는 일주일이 걸린다. 여느 작품처럼 먼저 밑그림을 그린 후 나무를 깎고 다듬어 채색한다. 손재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다. 그는 나무를 깎을 때 정성을 들이면 결과물은 반드시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 그것을 굳게 믿기에 매 순간 마음을 다해 다양한 얼굴을 조각해낸다. 제작된 장승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까지가 완성이다. 각 장승이 상징하는 장소성과 다른 장승들과의 조화도 고려해야 한다. 비바람에도 끄떡없도록 깊숙이 땅을 파서 꼿꼿하게 세운다. 어쩌면 장승은 나무가 있던 땅으로 다시 돌아가 또 다른 뿌리를 내리는 일과 같아 보인다. 


33년 지기, 장승과 나 

나무와 장인의 인연은 꽤 많은 이야기를 지나왔다. 김제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무렵 고향에 돌아와 농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작물보다도 나무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나무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 그는 우연히 목공예를 접하게 된다. 그렇게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하며 전주에 자신의 공방을 열었다. 그러나 공방 운영은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몇 년 만에 문을 닫고 금산사의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다시 민속공예품을 판매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옆에는 늘 나무가 있었다.


매일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그는 생각했다. 좀 더 문화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전국적으로 향토축제가 성행하던 시대, 그는 장승에 주목하게 된다. 그때 흘러 흘러 닿은 곳이 순창 복흥면 추령마을이었다. 가끔 민속공예품을 차에 싣고 팔러 나오던 동네였다. 오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마을에 볼거리가 없다는 게 안타까웠던 그는 1993년, 나무를 붙들고 전전하던 생활을 정리하고 드디어 추령에 정착했다. 순창과 정읍의 경계 지점으로, 내장산과 가까이 맞닿아있는 추령마을은 가을이면 단풍 구경을 나온 등산객들을 불러 모으기에도 좋은 자리였다. 그렇게 터를 잡고 장승을 하나둘 세우다 보니 이 마을에는 ‘추령장승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는 현수막 하나 달랑 걸어놓고, 허름한 오두막집을 빌려서 장승을 만들기 시작했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까 여기서 이제 공연도 하고 시골 사람들이 키운 농산물도 가지고 와서 팔고, 이 마을 전체가 축제장이 된 거야.





아이들이 체험으로 만든 장승



매년 10월이면 추령장승축제가 열린다. 30년 전, 마을 청년회와 함께 첫 회를 연 이후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해도 쉰 적이 없다. 각양각색의 장승 앞에서 소원을 빌기도 하고, 직접 작은 장승을 만들어보는 목공예 체험, 생태 탐방 등 프로그램도 알차다. 장인은 이 축제를 지켜내는 것에도 자부심이 크다. 매년 재미를 더하기 위해 여전히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며 스물아홉 번째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장승은 늘 살아있다 

요즘 장인의 고민은 장승의 현대화다. 전통도 시대에 발을 맞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승 특유의 강하고 험상궂은 표정 대신 하회탈처럼 활짝 웃는 얼굴을 새겨 넣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웃을 일이 더욱 필요하기에, 눈이 휘어지도록 밝게 웃는 장승을 세운다. 장승을 낯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귀여운 동물과 동화 속 인물들을 만들기도 한다. 부엉이와 청개구리, 곰, 일곱 난쟁이, 피노키오 등 일반적인 장승의 모습을 과감히 벗어난다. 


한평생 나무를 만지며 살았어도 여전히 나무가 장승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이 벅차고 즐겁다는 그는 이렇게 전한다. “나무는 원래가 까다롭지. 시간이 지나면 썩어버리니까. 그런데 그것이 자연의 이치잖아.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장승의 또 다른 멋이 보여요.” 제 몸이 나이가 들고 조금 썩어도 장승은 그 자리를 우직하게 지킨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새로운 꿈을 꾸며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장승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