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에서 만나는 미디어아트  2025.6월호

디지털 캔버스에 그리는 새로운 세계


사진_완산벙커 더 스페이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배경 삼아 걷고, 고전명화 속 인물들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일. 미디어아트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최근 몇 년 사이 미디어아트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미디어아트는 컴퓨터나 TV와 같은 디지털매체를 활용하거나 미술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형태의 예술장르를 의미한다. 물감 대신 디지털 기술이 하나의 도구가 되어 새로운 예술을 그려내는 셈이다. 


국내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기, 제주 ‘빛의 벙커’나 ‘아르떼뮤지엄’ 등의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이 하나둘 문을 열며 소소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전시장 전체가 캔버스가 되는 미디어아트는 관람객이 작품 안에 들어가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정지된 그림이 LED 화면 속에서 생명을 얻고, 우리의 작은 손동작, 발걸음 하나로 작품이 완성되기도 한다. 수동적인 감상에서 그치는 기존의 전시와 달리 미디어아트는 이렇게 작품과 관람객이 상호작용하며 재미를 더한다. ‘조용히’, ‘얌전히’ 관람하기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관람 방식에서 벗어난 덕에 작품의 의미가 쉽게 다가오는 장점도 있다. 


주목받는 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물론 있다. 미디어아트 전시는 새로운 창작물 대신 이미 알려진 작품에 기술을 더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경우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할 수 있는 가의 문제가 떠오르기도 한다. 또 ‘기술’보다는 ‘작품’에 집중해야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아무리 화려한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작품의 의미를 전하는데 제대로 쓰여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술과 예술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미디어아트는 계속해서 새롭고 흥미로운 장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 인기만큼 전국적으로 관련 공간들이 늘고 있는 변화도 반갑다. 전북은 지난 2월 개관한 전주 완산벙커를 비롯해 고창 선운미디어갤러리, 남원 피오리움 등이 최근 차례로 문을 열며 미디어아트를 만날 수 있는 특화공간들이 늘고 있다. 미술관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미디어아트를 통해 예술과 친해지는 연습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지역에 새롭게 문을 연 미디어아트 공간들을 소개한다.





어두운 지하 벙커를 밝힌 화려한 빛 

전주 완산벙커 더 스페이스




버려진 방공호의 재발견 

전주 완산칠봉 너머, 미디어아트 전시공간으로 문을 연 ‘완산벙커 더 스페이스’는 특별한 사연(?)을 가졌다. 1973년 이곳은 전쟁과 같은 국가 비상상황에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였다. 이후 군사적 용도가 사라지며 고구마 저장고로 활용되다가 2014년부터 완전히 방치되었다. 영영 버려질 위기에 놓인 이 공간은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유휴공간 문화재생 관련 공모사업을 통해 새로운 운명을 맞았다. 전주시는 완산벙커의 역사·문화적 가치에 주목하며 기반시설 조성부터 콘텐츠 기획, 관련 조례 제정 등을 진행했다. 그렇게 어두웠던 완산벙커에는 52년 만에 새로운 빛이 들어왔다. 


현실과 우주를 오가는 스토리텔링 

완산벙커는 복도에 여러 방이 연결된 개미굴 형태로, 보기 드문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전시관 역시 이런 특징을 살려 10개의 독립된 방에 다양한 주제의 미디어아트를 전시한다. 180미터에 이르는 통로를 따라 이어지는 방은 검은 장막 안에 화려한 세계를 감추고 있다. 장막을 거두고 들어서기 전, 매 순간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기대하는 재미가 있다. 완산벙커는 다중우주 속 또 다른 세계와 연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구소라는 주제로 스토리텔링을 했다. 관람객은 비밀요원이 되어 현실과 멀티버스를 오가며 비밀공간인 벙커를 탐험한다는 설정이다. 방마다 펼쳐지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은 커다란 세계관 안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차원의 문’은 특히 대표 콘텐츠로 꼽힌다. LED 화면과 사방의 거울을 활용해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빛을 전하는 공간이다. 그 가운데 서있으면 신비한 세계에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 마지막 방인 ‘포털’에서는 과거 실제로 쓰이던 환기구를 그대로 활용해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점이 독특하다. 대형 환기구 중앙에 태양이 떠있는 듯한 연출을 더해 포토존으로도 인기다. 이외에도 다리를 건너며 변화하는 낮과 밤을 경험하는 ‘시간의 강’, 직접 우주선을 조종해보는 체험 공간 ‘우주 방주’, 신비한 빛깔의 나무숲 사이를 걷는 ‘두개의 세상’ 등 공간마다 다른 구성들이 돋보인다. 



1973년 전시상황 대비 충무시설 준공 당시 모습



완성도 높은 공간을 위해  

지금의 공간이 완성되기까지, 지하 벙커의 특성에 따른 어려움도 많았다. 90%가 넘는 높은 습도와 이로 인한 결로, 곰팡이 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아치형의 천장 구조 탓에 프로젝터를 설치하는데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대신 바닥에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그 위로 다리를 놓았다. 콘텐츠 구성만큼 시설 관리에도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완산벙커는 올 하반기부터 전시 구성에 조금씩 변화를 줄 계획이다. 방들을 이어주는 복도에도 볼거리를 더하기 위해 고민을 하고 있다. 주말과 공휴일에는 한옥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완산벙커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한옥마을과 완산벙커를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차량 통행과 주차가 원활하도록 진입로를 넓히는 등 전시 공간 밖 환경도 점차 개선해나갈 예정이다.



전주시 완산구 완산5길 70

화-일요일 10:00-19:00





지역 자산을 새롭게 보는 방식 

남원 피오리움



남원을 대표하는 축제인 춘향제의 개막에 맞춰, 지난 4월 30일 미디어아트 전시관 ‘피오리움’이 공개됐다. 피오리움은 30년이 넘는 시간 방치되었던 옛 비사벌콘도 부지를 활용해 만들어졌다. 지역의 골칫거리로 여겨지던 공간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전시는 남원의 자연과 예술, 역사, 문화 등을 미디어아트라는 언어로 풀어낸다. 빛과 소리, 움직임이라는 감각적 요소를 통해 남원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손짓과 걸음에 반응하는 빛 

6개 테마로 구성된 각각의 공간은 남원의 풍경과 사람,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빛과 포토존으로 꾸며진 조형물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볼거리를 더한다. 특히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다양한 인터랙티브 작품들이 주목된다. 벽을 만지면 꽃잎이 흩날리고, 걸음이 닿는 곳마다 파도가 일렁인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작품에 반응하고 작품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손짓과 발걸음에 반응하는 빛을 느끼다보면 남원이라는 지역이 새롭게 다가온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추억을 남길 수 있다. 포토부스에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 AI를 통해 관람객의 얼굴이 광한루원을 뛰노는 춘향이와 몽룡이 캐릭터로 변신한다. 디지털 기기에 메시지를 입력하면 출구로 향하는 바닥 위로 텍스트 아트웍이 펼쳐지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특별한 미디어아트를 경험하며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지역을 잇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전시관 밖 ‘달빛정원’에서는 개관을 기념해 남원시 캐릭터 향이몽이의 명화전을 진행하고 있어 함께 둘러봐도 좋다. 남원시는 피오리움을 중심으로 광한루원과 함파우 아트밸리를 잇는 문화관광 벨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있는 그대로의 남원을 여행한 후 미디어아트를 통해 한 번 더 남원의 새로운 매력을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남원시 소리길 50 피오리움

월-일 10:00-19:00 ㅣ 화 휴무





미디어로 만나는 도시의 7대 유산 

선운미디어갤러리



고창 선운사 초입, 새로운 문화공간이 문을 열었다. 지난 4월 2일 개관한 ‘선운미디어갤러리’다. 고창의 자연과 유산을 미디어아트로 풀어낸 이 전시관은 과거 '선운초서문화관'과 '세계유산도시 고창 사진전시관'으로 활용되던 장소다. 노랑지붕을 새로 얹은 미디어전문 갤러리. 고창의 새로운 명소가 될 이 공간의 미래가 기대된다.  


세계유산, 디지털로 깨어나다 

고창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무려 7가지를 보유한 특별한 도시다.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세계자연유산 '갯벌', 인류무형유산 '농악'과 '판소리'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중 ‘무장포고문’이 고창에 있다. 또한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며, 선운산 천마봉, 아매불, 명사십리해변, 대죽도 등을 포함한 13개의 지질 명소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시는 이러한 고창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디지털 기술로 되살린다. 내부에 들어서면 벽면 전체와 바닥까지 펼쳐지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7대 유산에 대한 영상이 순차적으로 재생되는데, 특히 농악에는 고창농악보존회가, 판소리에는 지역 출신의 젊은 소리꾼 김응경 씨가 영상 제작에 참여하여 의미를 더했다. 


주목할 콘텐츠 중 하나는 고창의 군조(郡鳥)이자 멸종위기종인 뿔제비갈매기 이야기다.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약 100여 마리만 생존하는 희귀한 새로, 그중 일부가 고창 갯벌에 서식하고 있다. 운이 좋다면 구시포해수욕장 등에서 실제 뿔제비갈매기 가족을 만나볼 수도 있다. 이러한 뿔제비갈매기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해 관람객들에게 알린다. 


이 외에도 문수사, 고창읍성 맹종죽림, 고창갯벌, 상하농원 등 지역의 다른 명소들 또한 함께 미디어아트로 소개한다. 건물 입구 양쪽으로 고창군 홍보 영상을 활용한 비디오가 상영되며, 외벽으로는 문수사와 맹종죽림을 형상화한 벽화가 그려져 방문객들이 포토존으로 활용할 수 있게 꾸며졌다. 


치유와 힐링의 도시 고창  

선운미디어갤러리는 고창문화도시센터에서 운영하는 공간으로, '치유문화도시 고창'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는 거점 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힐링과 치유라는 컨셉에 맞게 갤러리 내부 또한 마치 자연 속에 들어온 것처럼 꾸며져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작은 공간이지만 깊은 메시지를 담은 선운 미디어 갤러리. 고창의 자연과 유산, 그리고 생명의 이야기를 새로운 감각으로 마주하고 싶다면 이곳에 방문해 보자. 




전주시 완산구 완산5길 70

화-일요일 10:00-18:00





고다인ㆍ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