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무형유산 한지장 故 류행영 (사진_국가유산청)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는 소식, ‘한지도시’를 표방하는 지자체의 홍보, 한지를 주제로 한 전시관과 기념품샵까지. 한지 산업은 겉으로 보기엔 품격있는 전통공예의 상징처럼 비친다. 하지만 한지 산업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정작 그 전통기술의 맥을 이어갈 손은 사라지고 있다. 시장의 규모는 점점 축소되고 있으며, 실제 산업의 기반인 장인들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한지장(韓紙匠)’은 닥나무 등의 원료 수급과 배합, 초지(抄紙), 건조에 이르기까지 전통 한지 제조 기술 전반을 보유한 장인을 뜻한다. 현재 국가 지정 보유자는 4명(홍춘수, 김삼식, 신현세, 안치용), 시·도 지정 보유자는 5명(최성일, 김일수, 장성우, 장응렬, 이상옥)이다. 이들 중 4명이 1940년대생으로 매우 고령이다. 이번 기획 취재에서 만난 한지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한지장의 고령화와 후계자 부재가 산업의 가장 큰 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2024년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전통 한지를 제작하는 공방은 2006년 28곳에서 2024년 기준 18곳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20여 년 사이 10곳이 사라진 셈이다. 대부분 가족 단위로 운영되고 있으며, 2세들이 가업을 잇는 것에 의존하고 있어 세대 교체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지장들의 고령화 추세를 고려할 때, 향후 10년 내 상당수 공방이 폐업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전통 한지를 생산할 기술과 설비를 갖추고 있음에도 주문이 없어 전면 기계 한지 제작으로 전환하거나, 한지 관련 체험 프로그램 운영에 집중하는 공방도 적지 않다.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외국인 근로자 고용을 고민하는 공방도 늘고 있다.

故 유배근 한지발장과 그의 작품
이에 더해 2023년, 故 유배근 한지발장의 별세는 전통 한지 제작의 핵심 공정에 큰 타격을 남겼다. ‘한지발’은 종이를 뜰 때 닥나무 섬유를 균일하게 걸러내는 대나무 도구로, 가늘게 쪼갠 대나무 촉을 일정한 간격으로 엮어 만든다. 한지발은 단순한 제작 도구를 넘어, 한지의 두께와 질감, 균질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문화유산 보수용 한지를 제작할 때도 당시 사용된 발의 ‘촉수(초수)’를 맞춰야 원래 종이의 질감과 특성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한지발 제작 기술을 보유한 장인은 전국에서 유배근 장인이 유일했다. 그는 한지발뿐 아니라 짝을 이루는 ‘한지발틀’까지 직접 제작해온 장인으로, 그의 기술은 단순한 작업 기술을 넘어 전통 한지 산업 전체의 맥락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현재 부인과 아들이 이수자로 지정되어 있지만, 정식 보유자 지정은 미뤄지고 있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하루빨리 보유자를 지정해 기술이 안정적으로 전승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통한지 공방들과 연구자들의 걱정도 크다.
한지발 기술의 단절은 단순히 한 장인의 부재로 그치지 않는다. 전통 한지는 본래 ‘외발뜨기’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식 ‘쌍발뜨기’가 도입되면서 외발 기술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외발뜨기는 쌍발뜨기에 비하여 그 기술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강도가 우수하고 윤기있는 양질의 한지를 만들 수 있다. 전통 한지를 온전히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 출발점이 되는 외발 제작 기술의 전승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성일한지 최성일 한지장
물론 지자체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주시는 한국전통문화전당의 무형문화유산 전수교육을 통해 꾸준히 유배근 한지발장의 제자를 양성하려 했다. 하지만 전수교육 역시 실제 직업으로의 연계는 이어지지 않았다. 한지발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젊은 세대가 이 길을 택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한지발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무형유산이 있다. 베틀의 주요 부품인 '바디'를 만드는 국가무형유산 바디장의 경우 2006년 구진갑 보유자 작고 이후 새로운 보유자가 지정되지 못했다. 이에 서천의 한산모시, 나주의 샛골나이, 안동의 안동포짜기 등 전통 베틀이 필요한 무형유산 종목들에 덩달아 빨간불이 켜졌다. 바디가 훼손되어 베를 짤 수 없을까 노심초사 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디장은 뒤늦게 2023년 ‘국가긴급보호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작년에는 전승자 발굴을 위한 공모까지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 차원의 지원에도 전승자 발굴이 극히 힘든 상황이다. 초기 대응이 아쉬웠던 바디장은 20년이 지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한지발장도 더 늦기 전에 보유자를 지정하고 전승자 발굴에 힘써야 한다.
한지의 경쟁력은 무형유산이라는 상징이 아니라 종이 품질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일본과 중국의 종이가 넘쳐나는 국제 시장에서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전통한지의 고유한 특성과 품질은 이를 만드는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지금의 한지 산업은 전통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치중한 채, 그 토대를 떠받치는 실제 기술은 방치하고 있다.
장인들의 부재는 산업의 가장 낮은 층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기술과 노동이 사라지는 문제다. 숙련된 한 사람의 손이 지닌 기술이 경제성의 논리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무형유산이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특별한 이유는 박물관 속 멈춰있는 유물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한지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나라를 위해 전통을 이어간다’는 장인 개인의 헌신과 명예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국가와 지자체는 보여주기식 시설 조성이나 단기적인 지원사업이 아니라 산업의 근간에 있는 ‘손의 가치’를 지켜내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