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구는 삶터, 진안 봉곡마을②  2026.2월호

봉곡마을의 삶을 만나는 공간들


학선리 마을박물관


2009년 12월 개관한 이곳은 주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물건들을 기증받아 조성한 생활사 박물관이다. 1970년대 낡은 일기장부터 옛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꼼꼼하게 적힌 외상 장부, 혼수로 가져왔다는 요강, 스무 살 시집올 적 인절미를 담아왔던 이바지음식바구니까지. 물건마다 얽힌 사연도 어르신들 손으로 꾹꾹 눌러써 함께 전시했다. 읽다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마을박물관은 외부 방문객보다는 주민과 그 가족, 출향민을 위한 공간이다. 과거 봉곡마을에서는 농촌의 삶을 ‘가난하고 못 배운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며 나라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자녀를 키우며 마을을 지켜온 삶은 그 자체로 훌륭하고 소중하다. 마을박물관은 이러한 삶을 긍정하고자 한 시도다. 최근에는 QR코드를 더해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어르신들이 직접 들려주는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시작은 ‘행복한 노인학교’ 이야기반이었다. 어르신들의 옛 이야기를 기록하던 과정에서, 이분들이 하나둘 떠나고 나면 마을의 기억 역시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농경문화가 아직 남아 있는 이곳의 삶과 역사를 남기고 싶다는 문제의식에서 이재철 위원장이 박물관을 제안했다. 단순히 물건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봉곡마을의 한 사람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듯 그들의 삶을 다음 세대로 건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해거름 갤러리


마을 어른들과 어느 정도 관계가 쌓였을 즈음, 2008년 ‘행복한 노인학교’가 문을 열었다. 폐교된 봉곡분교 건물에서 한글 수업이 열렸고, 박후임 씨는 이야기 교실을 운영하며 어르신들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농촌마을에서 살아온 어른들의 고단하고도 따뜻했던 일상이 글로 남겨졌다. 이후 재능 기부가 이어지며 컴퓨터반, 요가반, 도예반 등 프로그램도 차츰 늘어났다. 수업은 지금도 봉곡교회 교육관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고 있다.


노인학교가 진행되던 옛 공간은 ‘해거름 갤러리’로 다시 태어났다. 노인학교의 지난 시간과 그 속에서 피어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쌓인 시간만큼 볼거리도 많아, 여느 미술관 못지 않게 흥미로운 큐레이션(?)을 만날 수 있다. 수업을 통해 완성된 다양한 도예 작품과 그림, 자화상들이 전시돼 있으며, 어르신들이 직접 쓴 자서전과 시집도 함께 놓여 있다. 모두 같은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듯 모여 앉아 수업을 듣던 사진에서는 당시의 풍경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에게 노인학교의 수업은 생애 처음 경험하는 문화 활동이었다. 농사와 집안일에 쫓겨 평생을 보내며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분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흙을 빚어 형태를 만들며, 색을 고르는 시간이 쌓이자 조금씩 달라졌다. 서로의 글과 그림을 들여다보며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노인학교가 쌓아온 결실을 보여준다. 





문화공간 담쟁이

문화공간 담쟁이는 경기도의 한 대안학교가 진안 분교로 사용하던 건물에서 시작됐다. 학생 수가 줄어들며 학교 운영이 중단된 뒤, 건물 소유자가 이 공간을 마을의 공유 자산으로 내놓으면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됐다. 지금은 주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공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당에서는 매달 벼룩시장 ‘공유마당 썸썸’이 열려 지역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내부에는 만화 도서관이 조성돼 있으며, 방문객을 위한 숙소와 북토크·강연이 열리는 공간, 함께 음식을 만드는 공유부엌도 있다. 옆으로는 목공소가 이어져 있는데, 농기구 수리 같은 생활 기술을 배우는 목공 교실도 진행된다. 


이곳을 운영하는 문화공간담쟁이협동조합은 2014년, 지역에 정착한 귀농·귀촌 여성들이 모이면서 시작됐다. 녹색장터와 아동 돌봄, 책 읽기와 베이킹 모임 등 소규모 활동을 이어오던 이들은 공간이 생기며 협동조합 법인을 설립하고 활동을 확장해왔다.


봉곡마을의 다른 공간들이 주로 마을 안을 향해 있다면, 문화공간 담쟁이는 진안은 물론 무주, 장수 등 인근 지역 사람들까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다. 마을에 쌓인 긍정적인 변화와 실천이 외부로 퍼져나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봉곡 기억창고

마을의 연대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미디어 전시관이다. 조선 세조 때 청송 심씨와 김해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며 마을이 형성됐고, ‘봉황이 둥지로 날아든다’는 비봉귀소의 자리가 있다하여 봉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시관에는 이러한 마을의 기원과 함께 지리적 특징, 1940년대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마을의 풍경이 항공사진으로 담겨 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 또한 이 공간을 채운다.


귀촌한 그림책 작가가 그린 마을 지도 아래에는 어르신들의 이름이 적힌 USB가 놓여 있다. 이를 꽂으면 각자의 이야기가 음성과 사진으로 재생된다. 오른쪽 전시 공간에는 농촌의 일상과 유년기, 청춘 시절,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삶이 사진으로 이어진다. 인터뷰를 함께했던 봉곡마을 이장의 결혼식 사진도 이 가운데 한 장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담은 사진들은 개인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고, 마을의 역사로 겹쳐진다. 이 공간은 마을을 떠난 자녀 세대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기며, 부모 세대가 살아온 시간을 이해하고 조용히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고다인ㆍ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