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잔치 행사 모습
마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말랭이마을을 감싸고 있는 9동의 예술인 레지던스 공간이다. 예술인들의 작업공간을 지원하고 주민·방문객과의 문화적 소통을 향한다는 취지로 9곳의 빈집은 레지던스 공간으로 조성됐다. 2021년 입주자 모집 및 관리운영조례가 제정되고 참여 작가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2022년 1월, 마을에 첫 입주 작가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문학을 비롯해 미술, 한복, 도예, 마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평생을 이 동네에 살아온 고령의 주민들과 젊은 신입 주민들. 이들이 예술을 매개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지 기대가 모아졌다. 그러나 변화가 곧바로 드러나진 않았다. 서로를 알아가고 신뢰를 쌓고, 마을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찾아가는 시간이 먼저 필요했다.
전환점은 ‘말랭이마을 골목잔치’였다. 작가들 사이에서 “이제는 무언가 함께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입주 이후 마을과 어떻게 호흡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쌓이던 시점, 이들은 골목을 천천히 열어보기로 했다. 책방 ‘봄날의 산책’의 대표 박모니카 작가와 ‘1미터 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마술사 문태현, 전통 한복을 제작하는 작가 이현미, 군산 출신의 도예가 김혁수. 네 명의 작가가 주축이 되어 기획에 앞장섰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회의를 하고 주민 설명회를 열어 어르신들에게 참여를 제안했다. 작가와 주민 할 것 없이 여러 사람들의 손이 보태졌다.

레지던스 공간인 1미터 마술 공연장


골목잔치 한복 체험(위), 골목잔치에서 파전 굽는 어르신
2022년 봄, 별도의 예산이나 지원 없이 마을의 공터, 작가들의 공방을 무대로 첫 골목잔치가 열렸다. 작가들은 각자의 작업과 재능을 살려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거창한 무대나 완성된 결과물을 내세우기보다는 사람들과 마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명칭을 ‘축제’나 ‘행사’가 아닌 ‘잔치’로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 도시에서는 잔치라는 말이 낯설어지고 있다. 이웃이 마주보며 밥을 먹고 경사를 함께 축하하던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다. 골목잔치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잔치의 의미를 ‘요즘 감성’으로 불러내고자 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풀어놓고, 어르신은 파전을 부친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을 내놓는다. 여기에 스탬프투어 등 즐길 거리도 더했다. 스탬프투어를 완주한 방문객에게는 어머님들이 구운 노릇한 파전을 나눠주는 식이다. 입주 작가 대표를 맡고 있는 문태현 씨는 처음 잔치를 열던 때를 회상했다. “어르신들이 무조건 퍼주시려고 해서 난처한 순간도 있었어요.” 규칙을 설명하며 말리다가도, 결국 이런 모습이야말로 마을의 정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전한다. 돈보다 마음이 먼저 앞서는 풍경, 말랭이마을 골목잔치의 분위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자연스레 기존 주민들과 입주 작가들의 관계도 가까워졌다. 매달 한 번씩 골목잔치를 열며 호응도 쌓이기 시작했다. 성과가 드러나니 시에서도 관심을 갖고 작은 예산을 보탰다. 박모니카 작가는 “인근의 근대문화거리와 몇 걸음 차이인데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말랭이마을이 골목잔치를 통해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마을의 또 다른 주민이 되었다.
입주 작가 이현미
“말랭이 마을에서 한복을 지어요”

한복 작가 이현미는 말랭이마을의 예술인 입주가 시작된 첫해부터 함께해온 작가다. 올해로 5년째 활동하고 있는 어엿한 마을 주민이다. ‘한복, 아올다’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며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결혼을 계기로 군산에 정착했다. 고향인 전주와 군산을 오가며 오랜 시간 전통 한복을 배웠다. 개인 공방이 필요하던 시기,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말랭이마을을 알게 되며 이 마을과 인연을 맺었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 어르신들이 반갑게 맞아주셨지만 형식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어요. 말랭이마을은 조성되기까지 워낙 오랜 시간이 걸렸잖아요.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예술인이 마을을 찾아왔다가 나간 상태였어요. ‘어차피 또 왔다 가겠지’ 이렇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주민들을 생각하며 어렵지 않은 활동부터 시도했다. 천연염색 체험을 진행할 당시,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민들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얼굴을 마주하고 정겨운 수다를 나눴다. 마을회관에서 함께 밥을 먹고, 골목잔치가 열릴 때는 함께 장을 보러 나갔다. 일상적인 만남이 반복되면서 이들은 천천히 식구가 되어갔다.
“인사를 건네도 늘 무뚝뚝한 아버님이 계셨어요. 하루는 식혜를 챙겨서 인사를 드리며 공방에 놀러 오시라고 했죠.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 봉투 하나를 들고 찾아오셨더라고요. ‘밥은 먹고 살아?’ 하시면서 용돈으로 쓰라며 2만원을 주고 가셨어요. 저희에게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마음으로는 계속 보고 계셨던 것 같아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에요.”
마을 공동체를 위한 활동은 개인 작업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 작가는 한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직접 입혀보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말랭이마을에서 열린 오픈스튜디오와 전시, 골목잔치는 그 가능성을 넓혀줬다. 작업에 대한 반응을 바로 듣고 체험을 통해 한복을 경험하게 하며 작업을 이어갈 힘을 얻고 있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그에게는 마을 한편을 채우는 이 공방이 더없이 소중하다.
고다인ㆍ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