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의 레지던시로 전해지는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
유럽에서 시작된 새로운 예술흐름
레지던시의 역사는 1600년대 루이 14세가 설립한 예술기관인 ‘로마 아카데미 드 프랑스’가 시초로 전해진다. 이곳은 당시 젊고 유망한 프랑스 예술가들이 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을 직접 경험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로마에 일정한 거주지를 제공했다.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많은 예술가들이 거주 공간과 장학금을 지원받으며 예술과 건축 연구를 펼쳤다. 예술용어로서 ‘레지던시’라는 말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그 기능은 이미 여러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던 셈이다. 이후 1900년대 미국과 유럽의 기업이나 문화예술 애호가들의 후원으로 크고 작은 레지던시가 만들어졌다.
현대적 의미의 레지던시가 발전하며 1960년대에는 도시재생적 기능으로도 레지던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낙후된 지역의 폐교나 폐공장 등 유휴공간을 레지던시로 꾸미고 예술가들이 정착했다. 1980년, 장기간 방치되었던 냉동창고를 창작자들의 작업실로 만든 프랑스의 ‘레 프리고’도 그 중 하나다. 예술인들의 자유로운 창작 무대가 된 이곳은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되며 지역의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레지던시 ‘라익스 아카데미’ 역시 암스테르담의 빈 건물을 활용해 지은 왕립학교를 전신으로 한다. 라익스 아카데미는 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레지던시를 이어가며 전세계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 전경
창작자와 도시를 함께 살리다
우리나라도 서구의 운영 방식을 도입하며 뒤늦게 레지던시 사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레지던시 역사는 1995년 국내 최초의 레지던시로 꼽히는 광주시립미술관의 ‘팔각정 창작스튜디오’가 시작점이 됐다. 1995년은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처음 개막한 해였다. 이때 비엔날레 전시관이 위치한 중외공원의 유휴시설 활용을 두고 논의가 이루어졌다. 작가 양성과 창작 지원에 집중해오던 광주시립미술관은 팔각정 전망대를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 창작스튜디오로 열게 되었다.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내어주며 레지던시 문화에 앞장선 팔각정 창작스튜디오는 미술관 기반의 다양한 레지던시가 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후 시민을 위한 공공시설로 전환이 요구되며 2011년을 끝으로 운영을 마쳤지만, 이후에도 양산동 창작스튜디오, 해외 교류에 중심을 둔 북경창작센터,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꾸준히 이어오며 지금까지 340여 명의 국내외 작가가 광주시립미술관의 레지던시를 거쳐 갔다.
레지던시에 대한 관심은 199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창작스튜디오 확충 기본 계획」을 기점으로 더욱 본격화됐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지금의 대표적인 레지던시 문화공간들이 하나둘 문을 열었다. 화재로 소실된 마트 창고를 리모델링한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과거 직업전문학교 건물을 대규모 창작 공간으로 조성한 경기창작센터, 원도심의 근대 건축물을 고쳐 설립한 인천아트플랫폼 등 앞선 해외 레지던시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버려진 공간을 활용한 레지던시 공간들은 자연스레 도시재생과 지역 활성화 역할을 함께했다.

2022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
문화재단을 기반으로 정착한 레지던시 문화
레지던시는 정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국공립 레지던시와 기업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민간 레지던시로 구분된다. 프로그램에 따라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동안 머물며,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전문가 멘토링부터 입주 작가들 사이의 네트워킹, 전시 기회 제공 등 운영 주체에 따라 다양한 특성을 지닌 레지던시들이 생겨났다. 지역성에 기반을 둔 사업이기에 전국 지자체들도 레지던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소한(?) 레지던시 열풍이 불던 시기 전북에도 레지던시에 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전북 지역 레지던시의 시초로는 당시 유일한 민간 레지던시로 문을 연 ‘군산창작문화공간 여인숙’이 대표적이다. 실제 여관으로 운영되다 방치된 건물을 2010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작가들이 입주해 창작 활동을 벌였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레지던시의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 예술인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며 이곳을 거쳐 간 작가만 해도 100여 명에 달한다. 10년 가까운 세월 자리를 지킨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은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며 현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레지던시 사업은 중앙이나 지자체의 보조금 없이는 안정적인 운영이 쉽지 않은 한계가 있다. 지원을 받더라도 장기간 지속하는 일이 결국은 과제로 남는다.
여러 레지던시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레지던시 사업은 예술정책을 주도하는 지역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화재단의 레지던시 사업은 크게 재단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는 직접 지원과 민간 레지던시를 활성화하는 간접 지원으로 나뉜다. 전북에서는 현재 전주와 완주문화재단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으며,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이 ‘창작공간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 간접 지원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실제 지역의 다양한 민간 레지던시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