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양다방 ⓒ엽토51
도시가 빠르게 변할수록 오히려 오래된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우리 옆에는 늘 같은 모습으로 함께해온 오래된 가게, 대를 이어온 공간들이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세월을 버틴 미래유산, 그 안에는 특별하기보다 평범한 우리네 이야기가 있다.
삼양다방
“전주의 시간과 함께 쌍화차 한 잔”
국내 다방 역사의 산 증인인 전주 동문길의 삼양다방. 수십 년 전만 해도 전주에서 가장 세련된 찻집으로 손꼽혔고, 예술가들이 모여 전시를 열고 담소를 나누던 문화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생애 첫 커피를 마셨던 젊은이들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삼양다방을 찾는다. 1952년 문을 연 삼양다방은 서울 학림다방이나 진해 흑백다방보다도 앞선, 국내 최고(最古) 다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름에 담긴 ‘삼양(三養)’은 복과 기, 재물 등 세 가지 좋은 기운을 기른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시기 서울의 예술인과 문화인들이 전주로 내려와 머물던 시절, 삼양다방은 그들의 사랑방이자 단란한 아지트 역할을 했다. 이후 다방 문화가 꽃피운 1970~80년대에는 연인들의 대표적인 데이트 장소이자 시민들의 만남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시대가 변하며 다방은 하나둘 자취를 감췄지만, 삼양다방은 단순한 영업 공간을 넘어 전주의 문화와 추억을 품은 장소로 기억됐다.
그러나 긴 세월을 버텨온 삼양다방도 2013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사라질 위기에 놓인 다방을 지키기 위해 시민과 예술인, 지역사회가 힘을 모았고, 그 결과 이듬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 수 있었다. 오래된 다방의 풍경은 그대로 간직한 채, 강연과 전시, 공연이 이어지는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넓혀간 것이다.
2020년부터 운영을 맡은 장태영 대표는 삼양다방이 가진 역사와 정체성을 이어가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인문학 강좌와 전시,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며 지역 문화예술인과 시민을 잇는 장을 만들고 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차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선거 개표 방송이나 스포츠 생중계를 함께 시청하는 등 다방 본연의 사교 공간 역할도 이어지고 있다.
깨배기주단
“삶의 순간을 잇는 비단길”

가게를 보고 있는 손자 조정완 씨
결혼과 출산, 돌잔치, 회갑과 칠순까지. 사람들의 집안 대소사에는 늘 주단집이 있었다. 남부시장의 깨배기주단은 전주의 대표적인 주단집으로 오랫동안 시민들의 삶과 함께해 온 공간이다. 한때 혼수 이불과 한복을 장만하러 왔던 손님들은 손주를 데리고 다시 가게를 찾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수의까지 이곳에서 맞춘다. 가게 곳곳에는 단골들의 이름이 적힌 상자들이 남아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깨배기주단의 시작은 한국전쟁 직후 노상으로 시작한 남도상회였다. 처음에는 비단을 팔았고, 시대가 흐르면서 이불을 함께 취급하게 됐다. 이후 혼례 문화와 함께 성장하며 한복까지 품목을 넓혔다. 결혼을 앞둔 신랑·신부부터 아이의 돌잔치, 어르신들의 잔치까지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필요한 물건들을 갖춘 곳이었다. 한때 전주 중앙동 웨딩거리에 한복만을 취급하는 '비단길 2호점'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남부시장 깨배기주단 맞은편으로 옮겨왔다.

조정숙 대표
50년 가게의 역사는 창업주 고 조복순 씨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며느리 조정숙 씨는 시어머니를 "대장부 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한다. 물건을 보는 눈이 남달랐고, 품질에도 매우 엄격했다. 좋은 물건만 취급하다 보니 가격도 비싼 편이었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집이라는 평판이 쌓여 지역 유지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다. 조복순 씨는 그렇게 가게를 일구며 십남매를 키워냈다. '깨배기주단'이라는 이름에도 창업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주변에서 '깨배기'라고 불렀는데,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붙여준 별명이 그대로 상호가 됐다. 그 지인은 이시계점 이창호 국수의 할머니다.
현재 가게는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손자인 조정완 씨도 함께 일하고 있다. 시대가 흐르며 예단 문화는 크게 줄었고 명절에 한복을 입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쉬는 날 없이 가게 문을 열었지만 이제는 첫째·셋째 주 일요일마다 휴무를 한다. 전성기와는 다른 풍경이지만, 깨배기주단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다.

성수미점
“가난한 시절을 버티게 했던 쌀 한 말과 마음”
‘밥심’이라는 말, 듣기만 해도 왠지 속이 든든해지는 단어다. 한국인에겐 밥보다 중요한 게 없다. 그러니 세끼 밥이 귀하던 시절에는 동네를 지키는 쌀집의 존재도 귀했다. 성수미점은 그때 그 가난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60년 가까운 세월을 통과하고 있는 오래된 쌀집이다. 이제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글씨가 희미해진 간판이 그 세월을 말해준다. 쌀집과 주인이 나란히 나이가 들며, 이곳의 문을 연 이강덕 사장님도 어느덧 아흔을 앞두고 있다. 1966년 임실에서 전주로 상경한 그는 작은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쌀 배달 일을 시작했다. 자전거 한 대에 곡물을 가득 싣고 온 동네를 누볐다. 쌀 80kg를 이고지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거뜬히 해내던 시절이었다. 이후 오토바이를 장만하고, 조그마한 차를 사고, 어엿한 가게를 열게 되었다. 고향인 임실 성수면을 떠올리며 ‘성수미점’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1970~80년대, 이강덕 사장님은 26년이라는 긴 시간 이 동네 통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무료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그는 동사무소에 찾아가 일일이 관련 신청을 하고 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어느 집에 방이 몇 개고 형편은 어떤지, 명부를 들여다보며 이웃들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때의 꼬마들이 60대 어른이 되어 가끔 쌀집을 찾아오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며 많은 싸전들이 사라졌지만, 성수미점만은 문을 닫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이곳에는 곡물이든 마음이든, 그저 내어주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사장님이 있고, 그 마음으로부터 특별한 추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힘들이 모여 오랜 세월 성수미점을 받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옛 성수미점 앞 가족사진

이강덕 대표
“중화산동 여기가 옛날에는 다 초가집이었거든. 방 한 칸에 다섯 집이 같이 지내고 그렇게나 가난하게 살았지. 그 옛날 고생을 생각하면 지금은 늘 감사한 마음이야. 여기가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이상해. 내가 떠나고 나면 며느리가 이어서 가게를 지키려고 하고 있어.”
광명대장간
“용머리고개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엽토51
깡깡 쇠 두드리는 소리, 쌕쌕 풀무질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던 용머리고개. 형세가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은 이곳에는 한때 수많은 대장간과 유기전, 나무전, 골동품점이 모여 있었다. 정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제와 부안 등 서해안 곡창지대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덕분에 농기구를 만들고 수리하는 대장간들이 자연스럽게 들어선 것으로 전해진다. 세월이 흐르며 대부분 자취를 감췄고, 지금은 몇몇 대장간과 골동품점, 그리고 '유기전길'이라는 도로명만이 당시를 기억하게 한다.
광명대장간은 그 명맥을 잇는 대표적인 곳이다. 1956년 문을 연 뒤 1980년대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은 창업주의 아들인 김창기 대장장이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쇠붙이가 보편화된 시대지만 그는 여전히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농기구뿐 아니라 생활용품, 철물 등 쇠로 만드는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할 수 있어 꾸준히 찾는 이들이 있다. 한여름에도 대장간 안에는 화덕의 열기와 연기가 가득하다. 붉게 달아오른 쇠는 모루 위에 올려지고, 장인의 망치질이 이어진다. 쇠 내부에 남은 기포와 불순물을 제거하고 조직을 치밀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수없이 불에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쇠는 점차 원하는 모양을 갖추고, 마침내 쓸모 있는 쇠붙이로 탄생한다.
작업장 한편에는 '無心(무심)'과 '放下着(방하착)'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욕심을 내려놓고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뜨거운 불 앞에서 묵묵히 쇠를 다루는 장인의 모습은 오랜 세월 이어진 대장간의 정신을 보여준다. 망치 소리가 귀해진 시대가 되었지만, 광명대장간에서는 오늘도 용머리고개의 기억을 지켜내고 있다.
남문악기사
“90년 세월 골목을 채우는 레코드 소리”

ⓒ엽토51
스마트폰 하나로 우리는 어디서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LP 세대를 지나 카세트테이프가 등장하고 작은 MP3에 음악을 담아 듣던 시절까지, 시대를 건너며 음악을 즐기는 방식도 참 많이 변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 추억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 있다. 1933년부터, 93년의 역사를 지나온 남문악기사다.
남문악기사는 남부시장 인근에 축음기를 수리하는 가게로 처음 문을 열었다. 1962년 무렵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종합 악기사로 운영해오며 3대를 이어 자리를 지켰다. 그 시절 음반과 라디오, LP판, 각종 악기까지. 가게 안을 둘러보면 시대를 따라 음악이 지나온 역사가 고스란히 보인다. 70~80년대는 남문악기사의 황금기였다. 포크송의 인기와 함께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90년대 초까지도 대중음악 가수들의 음반이 인기를 모았지만 MP3가 등장하며 남문악기사를 비롯한 음악사들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힘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온 이장현, 이장선 씨 형제는 지금도 이곳의 음악이 멈추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음반 관련 매출이 줄어든 이후에는 악기 판매에 집중하는 등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으며 시대를 버텨오고 있다. 적자가 나더라도,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기에 쉽게 문을 닫을 수 없다. 그 가치는 많은 시민들도 물론 함께 나누고 있다. 언젠가 맞이할 100주년 기념행사를 꿈꾸며 이들은 느리게라도 이곳의 시간을 이어가려 한다.
행원
“예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집”

풍남문 가까이의 작은 골목, 특별한 이야기를 이어온 카페 ‘행원(杏園)’이 있다. 1928년 이곳은 ‘식도원’이라는 조선요리 전문점으로 처음 간판을 달았다. 이후 1938년부터는 술과 음식을 파는 공간이면서 기생들의 기예 공연이 펼쳐지는 ‘낙원권번’으로 운영됐다. 1942년 이곳은 또 한 번 이름을 바꾼다. 이때 전주의 마지막 기생으로 불리는 남전 허산옥이 건물을 인수해 ‘행원’을 열었다. 격변의 시절, 행원은 문인부터 화가, 명인, 명창 등의 예술인 식객들이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당시 이름을 떨친 화가 중 그의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허산옥은 생활이 어려운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후원하고 창작 활동을 북돋우면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놓지 않았다. 의재 허백련과 고암 이응노, 강암 송성용 등이 모두 그의 스승이다. 《국전》과 《전북도전》 등에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그는 점차 그만의 화풍을 완성하며 전통 수묵화의 정신을 지켜왔다. 그러나 권번 출신의 여성으로, 허산옥이 당대 화단에 기여한 활동들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역사 속 희미하게 남은 허산옥이라는 인물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 ‘행원’을 통해 조금이나마 선명해진다. 지금도 행원에 가면 벽에 걸린 그의 온화한 작품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현재는 도 무형유산 판소리 예능보유자인 성준숙 명창이 행원의 주인으로 있다. 1983년부터 한정식집을 거쳐 2017년부터는 한옥카페로 운영하며, 이곳에서 국악 공연을 열기도 한다. 한때 전주의 풍류 명소로 통했던 이곳은 이제 그만큼 북적이지 않는다. 그러나 남전 허산옥부터 소리꾼 성준숙까지, 전북 예인들을 통해 행원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다.
“내가 행원을 인수할 무렵 원래 남전 선생이 주인이었어. 그분이 자네는 판소리를 하니까 이집하고 자네하고는 참 적합하네! 그랬어. 그전부터 “이집은 자네 집이네 사소! 사소!” 나보고 그랬지. 그때는 내가 조금 여유가 있어서 그 집을 샀어. 그 집을 사니까 돈이 없지. 공부는 해야 되겠고, 그래서 장사를 한거죠. 거기서 장사해서 번 돈 가지고 공부를 하는 거야. 밤이나 낮이나 공부를 했지.”
─성준숙 명창 구술사 중ㅣ전북특별자치도립국악원

이시계점
“작은 금은방에서 탄생한 전설”

40대의 이창호와 부모님
이시계점은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귀금속점이다. 1940년대에 개업을 했으니 그 역사가 80년이 넘었다. 이런 이유로 미래유산 타이틀을 걸게 되었지만 이곳에는 그보다 더 유명한 게 있다. 바둑의 명인 이창호 9단이 태어난 집이 바로 이곳 이시계점이다. 전주 사람들에겐 이미 오래전부터 소문난 시계점·금은방이었던 이곳은 지난해 이창호와 그의 바둑 스승 조훈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승부’가 개봉하면서 다시 유명세를 탔다. 이 인기 덕분에 빛바랜 안내문도 새로 바꾸고 찾아오는 여행객과 손님들을 맞았다.
1940년 이창호의 할아버지는 현재 위치의 맞은편에 시계집을 열었다.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그가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기원에 갔다가 어깨 너머 배운 바둑에 천부적 재능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바둑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열한 살의 나이에 프로에 입단하며 국내외 타이틀을 휩쓴 그는 ‘돌부처’라는 별명처럼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냉철한 집중력으로 바둑계를 이끌었다.
이시계점은 이창호가 태어나 자라서 바둑을 만나고 프로의 꿈을 안고 서울에 상경하기까지 살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괜히 좋은 기운이 머무는 공간처럼 다가온다. 그의 아버지인 이재룡 씨가 대를 이어 운영하던 이시계점은 2008년 새 주인을 만나 지금까지 영업을 이어오고 있다. 현 주인은 당시 인근에서 세공 공장을 하며 그의 집안과 인연이 있었다. 주인장은 지금도 이웃을 추억하듯 정겹게 그들을 ‘창호네’라 부른다. 이시계점의 명성을 잇기 위해 상호를 바꾸지 않고 여전히 이창호 국수와 연결되는 공간으로서 이곳을 알리고 있다.
고다인ㆍ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