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 터 일대 ㅣ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긴 세월 과거의 모습 그대로를 지키는 일보다 중요한 건, 사라진 자리라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노력일지 모른다. 지금은 옛 모습과 다른 이름, 다른 풍경, 다른 역할로 변화했지만 여전히 전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옛 백양메리야스공장 |현 교동미술관
“기계 소리 가득했던 이곳, 문화예술을 담다”

미술관 앞에 전시된 오버록 기계
산업화 바람이 불던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이제는 전주의 대표 여행지가 된 한옥마을 안에 전주를 대표하던 공장이 있었다. 지금은 교동미술관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옛 백양메리야스(BYC) 공장이다. 당시 2,500평에 이르는 공장 부지에는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했다. 메리야스와 내복을 만들며 섬유산업의 중심이 되었던 공간으로, 그 시절의 전주, 여성 일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공장이 팔복동으로 옮겨가며 백양메리야스의 며느리이자 섬유를 전공한 김완순 관장은 공장 일부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들기로 한다. 그렇게 2007년, 봉제공장을 원형 그대로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한 교동미술관 본관이 들어섰다. 2010년에는 가까운 편직공장 자리에 교동미술관 2관도 세워졌다. 다른 공장 터 일대에는 부채문화관과 최명희문학관, 중앙초등학교 등이 함께 들어서 있다. 교동미술관을 걷다보면 과거 공장을 추억하게 하는 기계들을 만난다. 수많은 손길이 닿았을 낡은 오버록 재봉틀, 녹슨 기계들은 그때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에게 진한 향수를 일으킨다.
선각사|옛 금융조합
“도심 속 사찰에 숨은 우리의 역사”

ⓒ엽토51
선각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고즈넉한 산중턱이 아닌, 도심 속에 위치한 사찰 선각사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절의 모습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동문길 가운데 큰 규모를 자랑하며 서있는 선각사는 흔치 않은 서양식 건물을 사용한 사찰이다. 그 배경에는 일제강점기 역사가 숨어있다.
이 건물은 1929년 ‘아베’라는 일본인 건축업자가 조선금융조합연합회로 세운 건물이다. 본래 절 터로 이용하기 위해 고승들이 바닥을 닦아놓았던 곳이었으나, 당시 상부의 강압에 의해 땅을 빼앗겨 이후 금융조합 건물이 들어서게 됐다. 해방 후 농협 건물로 활용되던 건물은 2001년부터 지금의 대한불교선각재단 선각사로 이용 중이다. 뒤늦게라도 비로소 본래 사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선각사가 미래유산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이런 역사와 건축학적 가치가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용되는 이 건물은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현재 선각사는 외관을 정비한 것 외에는 건축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건물 뒤쪽에는 외벽 기둥과 연결된 네 개의 굴뚝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부에 들어가 보면 당시 어느 건축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장의 높이가 높다. 건물 중앙을 지나는 기둥이 전혀 없는 특징 덕에 이 건물은 법당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했다. 1층 안쪽에는 튼튼하게 지어진 대형금고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이곳이 과거 금융기관이었음을 유일하게 알려주고 있다.
한성여관 |현 베니키아 전주한성관광호텔
“얼씨구 좋다! 여관에 울리던 구성진 소리”

고사동 번화가 가운데 자리한 한성호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호텔 입구에 붙은 전주미래유산 표식은 어쩐지 궁금증을 일으킨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이라는 수식어를 지닌 이 호텔은 1949년 한성여관으로 문을 열었던 때부터 역사를 시작한다. 당시 창업주는 소문난 판소리 애호가로 전해진다. 그 덕인지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이 한성여관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여성국극단의 숙소로도 활용되며, 매일 명창들의 구성진 소리가 울리는 여관은 그야말로 문화와 예술을 품은 공간으로 통했다.
여관은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레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호텔로 전환해, 2009년 체인화 브랜드호텔 베니키아로 선정되며 관광호텔로 새롭게 단장했다. 지금은 호텔 곳곳에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형 호텔을 통해 과거 문화가 꽃피었던 한성여관의 서사를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가고 있다. 로비 한편에는 이 공간이 지나온 발자취를 감상할 수 있어, 지역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던 한성여관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미원탑 터
“그때 그 만남의 장소”
도시마다 대표되는 ‘만남의 장소’가 하나쯤 있다. 1960~70년대 전주 최고의 만남의 장소는 미원탑이었다. 1967년 지금의 팔달로 기업은행 사거리에 세워진 미원탑은 조미료인 미원을 광고하기 위해 설치된 탑이었다. 충경로가 없던 당시 기업은행 자리에는 전주시청이 위치해 있었고 주변에는 금용기관과 극장 등이 모여 있었다. 미원탑은 자연스레 전주의 중심 거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 시민들은 “미원탑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곤 했다. 밤에는 네온사인이 들어와 도시의 불을 밝히는 역할도 함께했다.

미원탑_대상주식회사ㅣ전주시민기록관 제공
이후 미원탑은 12년의 추억을 뒤로하고 1979년 철거됐다. 도시가 성장하며 차량 통행에 불편이 생겼고, 1980년 전주전국체전 개최를 앞두고 도시정비 과정을 거치며 철거가 결정되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꺼지고, 거리 위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지금도 많은 시민들은 미원탑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만으로 미원탑 터는 미래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나란히 놓인 미래유산 안내문과 도로원표만이 그 추억을 상기시킨다.
양사재
“시인의 마음과 선비 정신을 품은 그곳”

ⓒ엽토51
전주 한옥마을 안에선 전통 숙소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고즈넉한 한옥집으로 지어진 숙소 양사재 역시 그중 하나다. 그러나 이곳에는 전주미래유산 이름이 붙었다. 전주향교의 부속 건물인 양사재는 과거 유생들의 교육 공간으로 쓰인 깊은 역사가 있는 공간이다.
그 역사에는 특별한 이름도 함께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전북대학교의 전신인 명륜대학 사택지로서, 가람 선생은 교수 생활 기간 이곳에 머물렀다. 평생에 걸쳐 고전문학 보존과 국문학 정립, 한글 수호 등에 열의를 다한 그는 후학을 기르는 일에도 힘썼다. 이곳에서 가람은 후배 문인들과 잦은 술자리를 벌이며 여러 일화를 남겼다고도 전해진다. 신석정, 최승범, 박병순 등 지금의 전북 문단을 이루는 시인들이 당시 양사재를 자주 드나들곤 했다.
양사재 대문을 지나면 소박한 뜰과 ‘ㄱ’자 형태의 한옥 건물이 마당을 감싸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고 아늑한 멋이 느껴진다. 1980년, 양사재는 전면을 중수해 민가로 활용됐다. 이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2002년부터 뜻을 같이하는 세 명의 청년이 공동대표로 나서며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은 그들 중 한 명인 정재민 씨가 이곳의 주인장으로 한옥 민박을 운영하며 양사재를 지켜가고 있다. 100년 전 전주의 선비 정신이 녹아있는 공간은 시대를 지나 여행자의 쉼터가 되었다. 양사재가 품은 이야기를 알고 나면 투박한 한옥이 그 자체로 멋스럽게 다가온다.
충경사
“전주성을 사수한 예순넷의 의병장”

전주교대 뒤편, 남고산성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길목에는 충경공 이정란(1529~1600)의 충절을 기리는 충경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에 전주를 비롯한 호남을 왜로부터 지킨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이정란은 나라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의병을 모집해 전주성 수호에 나섰다. 왜군이 진안 방면에서 소양을 거쳐 호남으로 진격해 오자, 64세의 고령이었음에도 직접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 의병을 지휘했다. 이후 정유재란 때에도 전주부윤이 죽자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로 제수되어 어지러웠던 민심을 수습하고 전주성을 지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 순조 때 '충경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오늘날 전주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충경로 역시 그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많은 시민들이 매일 오가는 도로명이지만, 그 안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주를 지켜낸 한 의병장의 충의와 희생정신이 담겨 있다.
고다인ㆍ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