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미래유산, 도시의 기억을 잇다ㅣ이야기가 있는 마을과 길   2026.7월호

공간을 넘어 역사가 되다


보광재 옛길 ⓒ엽토51



길은 사람들을 오가게 하고, 다리는 물길 너머 세상을 이어주며, 마을은 삶의 터전이 되어 시간을 품는다. 누군가는 고개를 넘어 장에 다녔고, 누군가는 다리를 건너 학교와 일터로 향했으며, 또 누군가는 마을에 터를 잡고 생업을 이어왔다. 그렇게 수많은 발걸음과 일상이 쌓이며 길과 다리, 마을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지역의 역사가 되었다.




보광재 옛길  

“추억이 담긴 고갯길을 걷다”


전주시 서학동 흑석골과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를 잇는 보광재는 예부터 전주와 완주, 나아가 임실 운암과 신덕 지역을 연결하던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전주 남부시장으로 땔감과 농산물을 내다 파는 상인들과 전주의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면서 예전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지만, 한때 지역민들의 삶과 생업을 이어주던 없어선 안 될 고갯길이었다. 보광재라는 이름은 삼국시대 구이면에 있었던 사찰 보광사에서 유래해, 사찰로 향하는 길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밖에도 예로부터 귀한 손님이 오가는 길이라는 뜻에서 ‘화객도(華客道)’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고갯마을의 지세가 마치 호랑이나 곰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인 ‘복호항지맥(伏虎項之脈)’과 닮았다 하여 복항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광재 주변에는 옛사람들의 신앙과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흔적도 남아 있다. 인근에 산재한 돌무더기는 과거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사람들은 험난한 산길을 지날 때마다 돌을 던지며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이제 보광재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에서 물러났지만, 울창한 숲과 한적한 풍경을 간직한 옛길로 남아 있다. 자연 속 옛 고갯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인근 학산을 잇는 트레킹 코스로도 활용되고 있다. 보광재를 찾아 오랜 세월 이 길을 오갔던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함께 추억해보는 것은 어떨까.






어은쌍다리 

“사람과 사람을 이어온 쌍다리”


진북동에 위치한 어은쌍다리는 전주 시내와 어은골을 연결하는 다리로, 오랫동안 주민들의 생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해왔다. 전주천 건너편에 자리한 어은골 주민들은 시내로 오가기 위해 반드시 이 다리를 지나야 했으며, 지금도 지역 주민들의 주요 이동로로 이용되고 있다.


어은쌍다리의 역사는 1962년 건설된 보행자 전용 다리에서 시작된다. 이후 어은골의 인구와 교통량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1990년 기존 다리 옆에 새로운 다리가 추가로 건설되면서 오늘날의 쌍다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는 한쪽 다리가 차량 통행을 담당하고, 다른 한쪽은 보행자 전용도로로 활용되며 각각의 역할을 나누고 있다.


다리가 연결하는 어은골의 이름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은골은 일반적으로 ‘물고기가 숨어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마을의 지형이 마치 잉어가 몸을 숨긴 혈(穴)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피해 은거하던 거사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며, 전주천의 물고기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강으로 나간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장재마을 

“비를 막아내던 장인들의 손 끝”




전주역 뒤편에 자리한 장재마을은 철도로 인해 주변 개발이 제한되면서 오랫동안 농촌의 모습을 간직해 온 곳이다. 장재마을은 전통 지우산 제작이 성행했던 곳으로, 비닐우산이 보급되기 전까지 전주 지역 우산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당시 마을 곳곳에서는 대나무를 깎아 우산살을 만들고, 한지를 붙인 뒤 기름을 발라 방수 기능을 더하는 방식으로 지우산을 제작했다. 우산 공장이 여럿 들어서 있었으며, 다른 지역에서 일꾼이 찾아올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우산 제작은 주민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고, 전북무형유산 우산장인 윤규상 선생 또한 이곳에서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비닐우산이 보급되면서 지우산 산업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오늘날 이곳이 우산마을이었다는 사실은 주민들의 기억과 전주미래유산 동판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비닐하우스 농업과 화훼 재배가 이루어지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지만, 한때 수많은 장인의 손길로 전주 사람들의 비를 막아주던 공예마을로 기억되고 있다.






행치마을 

“아랫목의 온기가 시작되던 마을” 




아중역 뒤편에 자리한 행치마을은 우리 전통 주거문화의 핵심인 온돌과 깊은 인연을 지닌 곳이다. 온돌이 없으면 추운 겨울을 버티기 어려웠던 시절, 행치마을은 온돌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구들장을 생산하던 곳이다. 주민들은 마을 뒷산에서 넓고 평평한 돌을 캐내 구들장으로 사용했으며, 이렇게 생산된 돌은 전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으로 널리 공급되었다.


옛날에는 구들장을 '방독'이라고 불렀다. 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시절, 방독을 캐고 판매하는 일은 주민들의 중요한 소득원이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뒷산에서 채취한 방독을 구루마에 실어 전주 남부시장까지 가져가 팔았다고 한다. 구들장을 캐낸 뒤 남은 돌조각도 버려지지 않았다. 크고 작은 돌부스러기를 모아 담장을 쌓고 우물을 만드는 데 활용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구들장 돌로 축조한 오래된 우물과 담장이 남아 있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돌담과 세월의 흔적이 밴 우물에서는 예전 사람들의 생활상과 노동의 기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매곡교와 싸전다리 뚝방길, 이거두리 이야기  

“걸인들의 영원한 친구, 전설이 되다”



1931년 전주, 신기한(?) 장례식이 열렸다. 전라도 각지의 걸인 수백 명이 상여를 메고 장례를 주관한 이른바 '걸인장'이었다. 장례의 주인공은 평생 가난한 이웃과 걸인들을 돌보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보한(1872~1931), 일명 '이거두리'였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추모 행렬이 10리 넘게 이어졌다고 한다. 걸인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위해 옷을 벗어 주고 밥을 주었네"라는 글귀가 새겨진 묘비를 세워 그의 삶을 기렸다.


이거두리라는 이름은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전주 서문교회 신자였던 그는 부유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지만 서자로 태어나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그 때문인지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신분과 계층의 벽을 넘어 소외된 이들과 평생을 함께했다. 또한 만세운동을 하다 여러번 투옥되기도 한 항일투사이니, 당시 전주 사람들에게 그는 단순한 자선가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섰던 지도자이자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그의 삶은 극단 까치동의 연극 <애국이 별거요?>와 소리극단 도채비의 <삼월·애> 등을 통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전주의 3·1운동 발상지이자 서민들의 삶터였던 매곡교와 싸전다리 주변은 오늘날에도 이거두리가 남긴 나눔과 연대, 저항의 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고다인ㆍ류나윤 기자